서안나 시인 / 마흔 그 안온한
방에서도 발바닥이 시리다 이제는. 무릎이 튀어나온 후줄근한 생을 걸치고 걸어가는 저 여자. 그녀 안으로 길이 음반처럼 휘어진다. 여자의 몸에서 흩어지는 가벼운 골목길들. 상한 길들이 그녀의 몸에서 조금씩 부패하고 있다. 숨이 막히고 토할 것 같아 물렁거리는 거리들. 이젠 한 손으로 거리의 기억들을 막아낼 순 없어. 그녀가 제 안의 작은 창문을 열면 그대와 그대의 마른 가슴과 안경과 흐트러진 풍경들과. 의자와 열린 옷장들과 검은 기미들. 허리가 맞는 옷이 없어요. 고지서와 펼쳐진 책과 밑줄을 긋다 잠드는 모든 저녁들과 그녀의 사진첩에서 울리던 황금빛 노래들은 이제 길 위에 사소한 한 계절로 저장되리라. 수많은 추억의 문을 열고 닫으며 경계를 넘나드는 저 여자. 그녀의 몸안에 저장된 추억의 경로들. 그녀 안에서 출렁거리는 마흔 그 안온한 골목길들.
서안나 시인 / 11번 마을버스를 타다
핸들이 꺾이면서 강변역에서 차가 한 쪽 방향으로 힘차게 쏠린다 졸음에 덜 깬 사람들의 하루가 버스 종점에서 뫼비우스 띠처럼 잠시 헝클어진다 운전대를 잡은 사내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는다 그의 삶도 한 곳을 향해 쏠린 적이 많았다 집을 떠나 상경한 서울에서 그는 마음 하나로 세상을 향해 내달렸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는 출발점에 다시 도착하곤 했다 바퀴처럼 둥근 몸 하나로 결국 그는 자신의 노선을 이탈하지 못한다 꿈이 동전처럼 반짝거리는 여자를 만나 셋방 어둠 속에서 사랑이란 문을 함께 힘껏 열었다 이마가 희게 빛나는 영특한 아이들이 그에게로 다가와서 길이 되었다 밤이면 아직은 살아 볼만하다고 중얼거려주는 나이보다 늙은 아내가 때론 그의 문이 되어준다 가득 찰 수록 더 빨리 비어버리는 차고지의 아득한 고요 온 몸으로 내뿜는 매연과 요란한 경적이 이 도시에서 유일한 그의 발성법이다 언제나 종점에서 길들은 시작된다 그의 순수한 출발점이다 사내는 다시 힘차게 시동을 건다 운전대 앞에 본드로 단단하게 붙인 인형처럼 아침이면 그를 향해 온 몸으로 손을 흔들어 주는 아이들이 이제는 그의 길이 되어준다 그의 눈빛에 헤트라이트처럼 번지는 웃음 사내는 경로를 향해 다시 신나게 핸들을 꺾는다 요금함 속의 동전들이 한 쪽으로 쏠리는 소리 한 쪽으로 급하게 쏠릴 수 있는 힘들 그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는 차고지의 거대한 고요를 밀며 힘차게 엑셀을 밟는다
< 제3의 문학 > 2003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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