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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성해 시인 / 족제비 목도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4.

문성해 시인 / 족제비 목도리

 

 

지하철 안에서

할머니 목에 두른 족제비 목도리

할머니는 점잖게 눈감고 계시고

족제비도 머리와 꼬리 동그랗게 맞댄 채

점잖게 눈감고 있다

두 손 무릎에 포개 얹고

가벼운 요동을

지그시 즐기고 계시는 할머니

목을 한 겹 결코 조르지는 않게 감고서

무슨 포근한 꿈 꾸듯 또아리 틀고 있는 족제비는

글쎄 죽은 것 같지 않은 표정이다

어느 밤거리, 뒷골목이라도

한탕 멋지게 털고 다니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입가엔 천복을 타고난다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

지하철 안으로 추위에 절은 몸들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하루하루 내장을 채우기에도 급급한 몸들

체온을 나누려고 서로 밀착시켜온다

내장을 다 들어내고서야

불씨 하나를 품게 된 족제비

닭모가지 같은 껍질만 남은 목을

내장인 양 든든히 감싸고 있다

 

 


 

 

문성해 시인 / 공터에서 찾다

 

 

뭐 이렇게 질긴 고기가 다 있을까

좀체 속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뭉스런 애인 같다

어딘가에 분명 뼈를 감추고 있을 거야

고기의 진미 희망의 精髓 아아,

뼈다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란 대로에서

진종일 어미, 누이와 붙어있는 일보다

은밀하고도 즐겁게 느껴진다

 

페트병 한 개와 물고 뜯는 시간, 나는

이것을 단순해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썩은 고깃덩이로 던져진

이 도시에서 단단한 무기질의 희망

얻기가 그리 쉬운가

누르기만 하면 입 발린 언약들

당장이라도 쏟아내는 자판기들아

 

웃을 테면 웃어라

욕창이 번진 몸에 비명까지 지르는 이 물체는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완강하던 페트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텅 빈 속살 들여다 본 순간, 나는

속았음을 직감한다

 

어둠 속을 휘적휘적 걸어갈 때

앗! 저기 또 푸른 슬리퍼 한 짝이……

 

내 야성의 턱뼈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자라』(창작과비평, 2005)와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2007),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