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 / 모기장 동물원
나방이 왔다 풍뎅이가 왔다 매미가 왔다 형광등 불빛 따라 와서 모기장 바깥에 붙어있다 오지 말라고 모기장을 쳐놓으니까 젠장, 아주 가까이 와서 나를 내려다 보며 읽고 있다
영락없이 모기장 동물원에 갇힌 나는 한 마리의 슬픈 포유류
책을 덮고 생각 중이다 저 곤충 손님들에게는 내가 모기장 안쪽에 있는가 바깥 쪽에 있는가
애지 2004년 여름호
안도현 시인 / 튀밥에 대하여
변두리 공터 부근 적막이며 개똥무더기를 동무 삼아 지나가다 보면 난데없이 옆구리를 치는 뜨거운 튀밥 냄새 만날 때 있지 그 짓 하다 들킨 똥개처럼 놀라 돌아보면 망할놈의 튀밥장수, 망하기는커녕 한 이십 년 전부터 그저 그래 왔다는 듯이 뭉개뭉개 단내 나는 김을 피워올리고 생각나지, 햇볕처럼 하얀 튀밥을 하나라도 더 주워 먹으려고 우르르 몰리던 그때, 우리는 영락없는 송사리떼였지 흑백사진 속으로 60년대며 70년대 다 들여보내고 세상에 뛰쳐나온 우리들 풍문으로 듣고 있지, 지금 누구는 나무를 타고 오른다는 가물치가 되었다 하고 누구는 팔뚝만한 메기가 되어 진흙탕에서 놀고 또 누구는 모래무지 되고 붕어도 잉어도 되었다는데 삶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제대로 나는 가고 있는지, 가령 쌀 한 됫박에 감미료 조금 넣고 한없이 돌리다가 어느 순간 뻥, 튀밥을 한 자루나 만들어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뒤집히는 삶을 기다려오지는 않았는지 튀밥으로 배 채우려는 욕심이 크면 클수록 입안에는 혓바늘이 각성처럼 돋지 안 먹겠다고, 저녁밥 안 먹겠다고 떼쓰다 어머니한테 혼나고 매만 맞는 거지
시집 - 외롭고 높고 쓸쓸한 (1994년 문학동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선환 시인 / 다도해 외 1편 (0) | 2022.01.25 |
---|---|
오규원 시인 / 들찔레와 향기 외 1편 (0) | 2022.01.25 |
신경림 시인 / 길은 아름답다 외 1편 (0) | 2022.01.25 |
문성해 시인 / 족제비 목도리 외 1편 (0) | 2022.01.24 |
설태수 시인 / 흘러가는 물이 외 1편 (0) | 2022.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