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칠환 시인 /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현대시학 (2004년 10월호)
반칠환 시인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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