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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반칠환 시인 / 은행나무 부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4.

반칠환 시인 /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현대시학 (2004년 10월호)

 

 


 

 

반칠환 시인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에서

 

 


 

반칠환 시인

196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89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전쟁광 보호구역』과 시선집 『누나야』 시평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뉘도 모를 한때』, 『꽃술 지렛대』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 『지킴이는 뭘 지키지?』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음. 1999년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 2002년 서라벌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