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 시인 / 비 오는 날의 전화
쏟아지는 빗소리가 제 소리마저 지우더니 적막이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요란한 전화벨 소리 울리더니 여보세요 439-8696 맞습니까 예 그런데요 아 예 그라믄요 저 혹시 대구에서 살다 오신 분 맞습니꺼 예 그런데요 아 그럼 너 성식이 아이가 성식이 맞제? 예? 아니 아닌데요 아이라꼬? 내 다 안다 니 성식이 맞데이 아 아닙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어허 니 사람이 그라믄 못쓴다 니 분명 성식이 맞는데 왜 자꾸 아이라카노 여보세요 전화 잘못 하셨습니다 저는 성식이가 아닙니다 전화 이만 끊습니다 니 참말 너무 한데이 니 성식이 맞데이 내는 못 속인다 아이가 여보세요 저는 성식이가 아니고 김경호입니다 전화 끊습니다 아 잠깐 잠깐만 니 정말 성식이가 아이라 이기가? 예 아닙니다 그럼 좋데이 니가 성식이가 아이고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거 뭘로 증명할끼고 예? 니가 김경호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하며 전화 끊어지더니 제 소리 마저 지운 빗소리 적막이더니 '니가 너라 카는 걸 증명해 보이라 이기야' 소리만 온종일 들려 오더니
시집 <상처는 가장자리가 아프다>동학사
박경자 시인 / 췌장
우리 몸 속 오장육부 그 중 췌장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그곳에서 우리 몸 속 없어서는 안 될 소화 효소가 분비된다는데 위장으로 위장으로 탈없이 흘러들었던 단백질마저도 분해시키는 그것들의 길은 오직 췌관일 뿐이라는데 그것들이 만약 제 길을 가지 않고 체내 아무 데로나 흘러든다면 대책 없이 흘러든다면 우리 몸 속 장이란 장은 다 녹아 버린다는데 혈관도 녹아 버린다는데 단백질로 된 몸이란 몸은 다 녹아 버린다는데 속수무책 그렇게 독이 된다는데 슬픔이 된다는데 이 한번의 생이 목숨을 담보한 목숨이라는데 용케도 한 목숨 이제껏 부지함이 구구절절 목이 메이는데 생과 사는 어차피 한 몸이었는데 오늘은 독이 되고 싶은 건데 슬픔이 되고 싶은 건데 피보다 진하게 내 안에 흐르는 너 녹이고 싶은 건데
시집-상처는 가장자리가 아프다-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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