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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순미 시인 / 청사포 사진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5.

손순미 시인 / 청사포 사진관

 

 

 바다가 전용 배경인 사진관은 비어 있다 가끔 파도가 들렀다 가고 벽에는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 유물처럼 걸려 있다 그들은 추억을 포기한 것이다 점포세가 놓인 사진관은 종일 손님이 들지 않는다 그들 삶은 다시 인화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밀물다방 오토바이 커피 대신 레지를 날라대는 소리 포구를 밀고 간다

 

 해의 긴 렌즈가 사진관을 포착한다 활어차가 지나가고 생선장수가 지나가고 술취한 사내들이 지나가고 저녁 어스름도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고무대야에 얹혀 간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사람들이 뱃머리를 돌리며 사진관쪽을 건너다 본다 삶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해의 긴 렌즈가 남아 있는 빛마저 찍어간다 깜깜한 포구는 거대한 암실이다 사진관은 그 암실에 맡겨진다 밤새 현상된 풍경은 사진관에 다시 내걸린다 아무도 그 풍경을 찾아가지 않는다

 

 


 

 

손순미 시인 / 적사과

 

 

 남자는 빨갛게 구워진 사과를 팔고 있었다 사과는 남자의 직영농장에서 알맞게 구워 온다고 하였다

 

 남자의 농장은 거대한 아궁이 인 셈이다 그 아궁이 속에는 늘 다량의 햇빛과 투명한 공기가 불탄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 한 상자를 주문했다 남자는 사과 맛이 한 마디로 뜨겁다며 태양같이 웃었다 배달된 사과를 보고 아이들은 불덩이 같다고 하였다

 

 나는 사과껍질을 조심스럽게 깎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사과 속에 들어앉아 있다 나도 사과 속으로 들어갔다 덜커덩 사과의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었다

 

 사과향은 오래도록 이글거렸다 사과의 문이 열리고 아이들은 남자와 농장과 햇볕과 공기를 자꾸 분석하였다

 

 


 

손순미 시인

1964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경성대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이 있음. 2008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