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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재휘 시인 / 오래된 한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5.

심재휘 시인 / 오래된 한옥

 

 

햇살이 몸에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초겨울 오후

미음자(字) 한옥(韓屋)이 순식간에 헐리어 제 속을 드러낸다

푸른빛의 족쇄에서 벗어나

땅으로 갈 것들은 땅으로 가고

먼지로 날아갈 것들은 먼지로 가고

참으로 오랫동안 손잡고 집이었던 것들이

뿔뿔이 거리로 나서는데

집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기왓장 몇 개

아직 제 삶인 양 허공에 떠 있다

저들은 원래 하늘에 속한 것이었을까

바람의 몸을 하고

바람소리로 중얼거리는 기둥 없는 집

기둥은 누워도 기둥이고

허공의 기왓장은 여전히 지붕이고

올해 아버지는 잃을 것 없는 일흔이시다

 

 


 

 

심재휘 시인 /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심재휘 시인

1963년 강릉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  『중국인맹인안마사』이 있음. 저서 <한국현대시와 시간>. 2002년 제8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