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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호 시인 / 길을 향하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6.

조연호 시인 / 길을 향하여

 

 

 비가온다. 비는 길 위의 사람들을 허물며 처마 끝으로 몰려간다. 아무렇게나 구름은 둔덕을 두드리며 걸어가고 나를 닮은 가지 하나가 빗발을 꺾으며 물길에 떠내려간다.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구름 뒤편에 머무는 맑은 소리들이 먹으로 번진 하늘로 옮겨온다.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조연호 시인 / 오월

 

 

 비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타는 소리보다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집 - 죽음에 이르는 계절 (2004년 천년의 시작)

 

 


 

조연호 시인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과 『저녁의 기원』(랜덤하우스,  2007)이 있다.  제5회 수주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