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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은영 시인 / 그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6.

진은영 시인 / 그날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 시계를 뒤집어놓았다

 

<동서문학>  2004년 여름호

 

 


 

 

진은영 시인 / 긴 손가락의 시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박사).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과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와 그밖의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저서 등이 있음. 2009년 제14회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2010년 제56회 현대문학상, 2013년 제15회 천상병 시문학상, 2013년 제2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 및 인문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