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철 시인 / 순진 무분별
암자에 온 어느 보살의 딸 희옥이는 뭐에 홍이 났는지 왼 신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 왼발에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무줄 뛰는 시늉도 하며 깡충깡충 잘도 뛰어논다 한손에 떡 한조각 들고 엠비씨디이에프지 영어 노래 부르며
왼 신을 왼발에 신고 오른 신을 오른발에 신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 몇번을 일러주어도 그때뿐 볼 때마다 꼭이 왼 신은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은 왼발에 신는데 그러나 무슨 상관이람 애초에 무슨 상관이람 왼 신을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을 왼발에 신고 희옥이는 저 혼자서 신나게 놀다가 신발은 저만치 내팽개친 채 법당 앞 마룻바닥에서 곤히 잠들었다
윤재철 시인 / 도토리 농사2
희한한 일이지 이게 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 그렇게 샅샅이 훑고 뒤졌는데 왜 안 보였을까 산보 삼아 도토리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 도토리 주워보지만 낙엽 속에 숨은 도토리는 이쪽에서 보면 보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주머니들 아침이면 죽 훑어 산을 오르지만 보는 만큼 줍고 보이는 만큼 줍는 일이지 안달하며 죄 주우려고 머무는 법은 없다 오늘 안 보인 것은 내일 보이고 내가 못 본 것은 남이 보고 그래도 안 보이는 것은 낙엽에 묻혀 다람쥐도 먹고 벌레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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