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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재철 시인 / 순진 무분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6.

윤재철 시인 / 순진 무분별

 

 

암자에 온 어느 보살의 딸 희옥이는

뭐에 홍이 났는지

왼 신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 왼발에 신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무줄 뛰는 시늉도 하며

깡충깡충 잘도 뛰어논다

한손에 떡 한조각 들고

엠비씨디이에프지 영어 노래 부르며

 

왼 신을 왼발에 신고

오른 신을 오른발에 신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

몇번을 일러주어도 그때뿐

볼 때마다 꼭이

왼 신은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은 왼발에 신는데

그러나 무슨 상관이람

애초에 무슨 상관이람

왼 신을 오른발에 신고

오른 신을 왼발에 신고

희옥이는 저 혼자서 신나게 놀다가

신발은 저만치 내팽개친 채

법당 앞 마룻바닥에서 곤히 잠들었다

 

 


 

 

윤재철 시인 / 도토리 농사2

 

 

희한한 일이지

이게 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

그렇게 샅샅이 훑고 뒤졌는데

왜 안 보였을까

산보 삼아 도토리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

도토리 주워보지만

낙엽 속에 숨은 도토리는

이쪽에서 보면 보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주머니들 아침이면

죽 훑어 산을 오르지만

보는 만큼 줍고

보이는 만큼 줍는 일이지

안달하며 죄 주우려고 머무는 법은 없다

오늘 안 보인 것은 내일 보이고

내가 못 본 것은 남이 보고

그래도 안 보이는 것은 낙엽에 묻혀

다람쥐도 먹고 벌레도 먹는다

 

 


 

윤재철(尹載喆) 시인

1953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2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1985년 성동고 재직 시절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투옥, 해직.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 교단에 섰다가 2015년 2월 정년으로 교직에서 물러남. 1987년 첫 시집 《아메리카들소》를 펴낸 후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생은 아름다울지라도》『세상에 새로 온 꽃』『능소화』『거꾸로 가자』등. 1996년 제14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2013. 제6회 오장환문학상. 서울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