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인 / 그날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 시계를 뒤집어놓았다
<동서문학> 2004년 여름호
진은영 시인 / 긴 손가락의 시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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