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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림 시인 / 고양이! 고양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6.

이경림 시인 / 고양이! 고양이!

 

 

오후 네 시, 아파트 뒤 비탈진 기슭

치마폭만한 바위를 달구는 햇볕 위에 벌렁 누워

고양이 한 마리 미동도 않는다

어떡 독한 응시도

숨막히는 경계도 없다

한낮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오후의 후미짐을 방패삼은

저 묘한 안락!

 

머지 않은 곳에서 노파 하나가

머리칼이 명주실이 되도록 묵언정진 중인 줄도 모르고

더 아래는 들쥐 한 마리 캄캄한 하수구를 빠져나와

풀숲으로 줄행랑 중인 줄도 모르고

건물 모서리 삼각 그늘 속에서 간수 같은 저녁이

열쇠꾸러미를 절그렁거리며 오는 줄도 모르고,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듯한 자세로 누워

무얼 보는 것일까?

 

저 위, 어슬렁거리는 너털구름에 씌인 듯

깔고 누운 치마바위에 씌인 듯, 아니

누렁 고양이 같은 것에 씌인 듯

 

오후 네시의 황천黃泉을 홀랑 뒤집어 쓰고 누운

저 고양이,

고양이!

 

시집 - 상자들 (2005년 랜덤하우스중앙)

 

 


 

 

이경림 시인 / 어머니, 지우신다

 

 

휑한 방에 누워 자꾸 지우신다 장롱만한

지우개로 삯뜨개질의 날들을 지우신다

지워도 자꾸 풀려나오는 실꾸리, 실같이 가는

기억의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실꾸리가

구멍 저편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 팔을 넣고 휘젓는 어머니, 한 실마리가

잡. 혔. 다. 친친 감긴 한시절이 끌려나온다

치마꼬리에 매달린 죽은 아들, 찐 고구마,

없는 치료비......, 욕설의 날들이,

찬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 위로

오색 날개의 퉁퉁한 치욕들이 윙윙 난다

저리 가!

쫓아도 자꾸 붙는다

 

 


 

이경림 시인

194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1989년 계간 《문학과 비평》을  통해 〈굴욕의 땅에서〉외 9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 먹자』『상자들』『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와 산문시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한국 번역원 선정 영어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Devour it』이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와 비평집 『관찰의 깊이,사유의 깊이』가 있다. 제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