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림 시인 / 고양이! 고양이!
오후 네 시, 아파트 뒤 비탈진 기슭 치마폭만한 바위를 달구는 햇볕 위에 벌렁 누워 고양이 한 마리 미동도 않는다 어떡 독한 응시도 숨막히는 경계도 없다 한낮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오후의 후미짐을 방패삼은 저 묘한 안락!
머지 않은 곳에서 노파 하나가 머리칼이 명주실이 되도록 묵언정진 중인 줄도 모르고 더 아래는 들쥐 한 마리 캄캄한 하수구를 빠져나와 풀숲으로 줄행랑 중인 줄도 모르고 건물 모서리 삼각 그늘 속에서 간수 같은 저녁이 열쇠꾸러미를 절그렁거리며 오는 줄도 모르고,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듯한 자세로 누워 무얼 보는 것일까?
저 위, 어슬렁거리는 너털구름에 씌인 듯 깔고 누운 치마바위에 씌인 듯, 아니 누렁 고양이 같은 것에 씌인 듯
오후 네시의 황천黃泉을 홀랑 뒤집어 쓰고 누운 저 고양이, 고양이!
시집 - 상자들 (2005년 랜덤하우스중앙)
이경림 시인 / 어머니, 지우신다
휑한 방에 누워 자꾸 지우신다 장롱만한 지우개로 삯뜨개질의 날들을 지우신다 지워도 자꾸 풀려나오는 실꾸리, 실같이 가는 기억의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실꾸리가 구멍 저편으로 떨어진다, 그 속에 팔을 넣고 휘젓는 어머니, 한 실마리가 잡. 혔. 다. 친친 감긴 한시절이 끌려나온다 치마꼬리에 매달린 죽은 아들, 찐 고구마, 없는 치료비......, 욕설의 날들이, 찬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 위로 오색 날개의 퉁퉁한 치욕들이 윙윙 난다 저리 가! 쫓아도 자꾸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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