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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철수 시인 / 밤목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8.

오철수 시인 / 밤목련

 

 

달이 참 밝다

밤목련이 이불 홑청에 새긴 꽃무늬 같다

그 밑에 서서 처음으로 저 달과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물주머니처럼 발 밑에 넣고 자면

사십 년 전

담쟁이넝쿨 멋있던 적산가옥 길

백설기 같던 목련

필 것 같다

 

역사의식도 없이 희고 희었던

일곱 살 배고픔처럼

 

 


 

 

오철수 시인 / 선인장

 

 

사무실 한 귀퉁이

볼품 없는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선인장에 물을 주다가 생각한다.

연탄재 같은 흙에 뿌리를 박고

어떤 관심으로부터도 원망을 버린 무표정한 얼굴.

다른 땅을 탐하겠다는 욕망도 버린 채

스스로 단단하게 굳어 버린 초록 껍질

지겹도록 같은 자세로 있다가 언제부턴가

모든 정신이 가시가 되어 버린 聖者 그래 성자.

선인장은 좁다라던지 목마르다는 일체의 불평이 없다.

꼿꼿이 서서 제 몸에 과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소리 없이 스스로 말려 죽여버린다

죽여서도 같이 데리고 사는

선인장에 물을 주다가 갑자기 노여워졌다.

늘 욕망의 찌꺼기들을 피부병처럼 가진 내가

지금 그의 가시를 보고 있다니, 저 번쩍이는 정신을!

 

물을 주어도 선인장은 담담하다

눈빛이 하늘에 걸린 수도승처럼

 

詩集『조치원역』2001년

 

 


 

 

오철수 시인 / 해바라기집

 

 

詩를 써서, 만약에

돈을 벌게 되어 근교 어디쯤에 집을 사게 된다면

나는 마당에 뒤란에 담장 옆에

해바라기를 엄청나게 많이 심을 것이다 하여

이웃들이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

잠깐 다니러 온 이들도 우리집을 보며 해바라기집이라고 부르고

머리 희끗희끗한 내 처가 출퇴근하는 것을 보고는

 

논 건너 아랫마을 분이 '저기 해바라기집 안사람이야'라고 소개하고

아들도 해바라기집 아들로 불리고

친정 나들이하는 딸도 해바라기집 딸로 불리고

가끔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외상 신세지는

동네구멍가게 장부에도 '해바라기'로 적히도록

해바라기를 많이 아주 많이 심을 것이다

마당이 온통 노란 날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내 집에 처음 오는 이들도 버스기사에게

상가집이라고 묻지 않고

해바라기집이 어디냐고 물을 수 있게

 

만약에 내가 詩를 써서 돈을 벌어…

 

 


 

오철수 시인

1958년 인천출생. 국민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6년 <민의>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아버지의 손>. <먼길가는 그대 꽃신은 신었는가> <아주 오래된 사랑>. <아름다운 변명>.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 노동문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90년 전태일 문학상 수상. 현재 사이버노동대학 문화교육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