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선 시인 / 중심을 본다 - 골다공증
마루에서 뒹굴던 늙은 호박 시들기 시작했다. 꼭지 쪽으로 반을 쪼개어보았다. 씨줄날줄 얽힌 속심 붉은 사연 걷어내니, 호박씰 떠받치고 줄기 하나 터억 버티고 서 있다.
텅텅 비어 있을 거라던 호박속 거미줄, 갓 빠져나온 살줄기들 수술실 해부용 뇌를 보는 것, 실핏줄이 내 안의 공명과 부딪힌다.
햇빛도 들지 않는 호박통 구석구석 바람 들 일 없는 두꺼운 껍질속에서도 호박씨 새싹 싱싱하게, 콩나물 줄기 더 씩씩하게 쭉쭉 얽혀 있다. 실핏줄 천 년 숨구멍, 황금빛 숨결 스며든 것일까. 우주 간 그 어디에도 한 발 재겨놓지 못한 이 호박떡잎의 생명 중심이 보인다.
시집 -『독약을 먹고 살 수 있다면』(2000, 도서출판 天山)
문봉선 시인 / 만년필 씨 귀하
둥근 기둥으로 가득 물배를 채웠다가 이리저리 맘대로 굴려지는 것은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뚝뚝 물감으로 쏟아지는 핏자국 하얀 종일 마구 구겨뜨리는 날카로운 혀. 달밤 파란 수혈을 하고 나면 구들위에서 심장은 익는다. 붉은 핏방울이 흰 살결위에서 다 타들어가도록 늘 나를 허기지게 하는 배불뚝이바보. 죽지 말아라, 죽지 말아라. 구멍 안쪽 얌전히 갈무리져 있는 혀일지라도 어느 날 네 맘대로 날 가지고 놀리기도 하는 마술대롱. 네가 날 평생 문지르고 찔러 닳아빠지게 해도 내 몸과 마음은 언제나 하프를 켤 수 있어 기쁘다.
시집『독약을 먹고 살 수 있다면』(2000, 도서출판 天山)
문봉선 시인 / 가죽 미륵과 보름달
칠갑산 장곡사 언덕에는요 한 쪽 찢어진 큰 북이 있었는데요 (누가 칼로?)
찢어진 북을 두들겨 보다가 찢어진 틈으로 그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요 안으로 안으로 잠기던 목쉰 울음들이 빛살타고 뛰쳐나가 내 품에 안겼지요
아기 울음 천둥 번개에 갇혀 고요무늬들 칼금따라 부서지고 비밀 상처 봄초록 잎사귀 따라 흐르던 소리 따라 산과 내가 흐르던
그 소리 다음에야 울고 싶었다고 황홀히 말하더라고요 가죽 미륵 쏟아놓고 텅 빈 속 다 비워놓고 깨진 보름달을 흔들더라고요 둥둥둥 울려대더라고요 (오늘 나는 그 북 앞에서 기절할 뻔했습죠)
*시- 계간 『시향』봄호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철수 시인 / 밤목련 외 2편 (0) | 2022.01.28 |
---|---|
강다솜 시인 / 상처와 사막에 관한 에테르 (0) | 2022.01.28 |
김건일 시인 / 앞니 외 1편 (0) | 2022.01.28 |
최병근 시인 / 빗방울 조문객 (0) | 2022.01.28 |
고영조 시인 / 감자 외 1편 (0) | 202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