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온윤 시인 / 버지니아
주머니마다 한 움큼씩 돌멩이를 채워 넣고 나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갑니다 강물의 투명한 물결이 되어 나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거예요
자꾸만 나의 생활이 걸음마를 못 떼는 아이처럼 넘어지는 이유는 그림자를 매달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살아생전 나는 그림자보다 무거운 걸 본 적 없습니다 마음을 벌목하듯 삶의 의지를 주저앉게 하는 이런 악랄한 무게를 매달은 채로 사람들은 어리둥절 땀을 훔치며 순진하게 살아가죠 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제 발목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고통을 눈치채지 못하죠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 위해 신발을 벗어두고 걸어본 적 있나요? 어떤 걸음에는 흩뿌려놓은 압정처럼 뽀족함이 어떤 걸음에는 얼음을 으깨어 밟는 서늘함이 느껴집니다 거부할 권리는 없어요
공중으로 삼 센티쯤 떠올라서 걷지 않는 한 받아들여야 합니다 통점을 꾹꾹 찌르며 자신을 현실이라 부르도록 강요하는 내 몸, 내 삶의 무게를요
아, 불쌍한 두 발은 이 순간에도 평지를 걷고 있군요 그런데 중력은 왜 자꾸 나를 아래로 아래로 손짓하는 걸까요 이렇게 혼백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걷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왜 그림자의 오기에 굴복하는 기분이 될까요
지금 나는 걸어가고 있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한 칸씩 계단을 내려가는 기분으로
소실점을 바라보면 앞으로, 앞으로 그러나 내 몸은 아래로 아래로
내가 꿈꾸는 미래에 정작 내가 없다는 것 나는 그걸로 버텨왔는지도 모릅니다 춤추는 구두를 벗기 위해 제 발목을 잘라야 하는 이상한 세상의 동화처럼
그림자를 벗어 선반 위에 접어두고 주머니마다 한 움큼씩 돌멩이를 채워 넣고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세상에서 가장 깊고 투명한 물결이 되어 나는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 <상상인> 2021년 7월
조온윤 시인 / 원주율
초코파이를 받았다 피를 뽑고 약해질 때마다 착해지는 기분이 된다
피주머니가 빵봉지처럼 부풀어 오르는 동안
원의 둘레를 재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한 직선들을 잇고 이어서 곡선을 만들었을 수학자에 대해 사실 휘어짐이란 착시일 뿐이라고
뼈의 모양은 직선이지만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잇고 뼈를 또 잇고 이어서 둥그런 원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솜으로 막아 피를 굳게 하는 동안엔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전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아픔이 선함에 비례한다면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는 맛있고 누군가는 상냥했다 상냥한 사람이 되기까지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다
헌혈의 집을 나서자 파이가 빨간 비닐을 벗으며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고
그 속으로 역광을 만들며 걸어가는 사람들 인간의 모양이 휘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과 있었다 우리가 햇볕 속에 함께 있음을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이라 느낄 때 지평선은 물결이 되어 일렁거리고
이제 바늘자국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돌고 돌아서 나의 차례였다
-격월간 《현대시학》 2019년 3-4월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규리 시인 / 트랙 외 1편 (0) | 2022.03.06 |
---|---|
주하림 시인 / 블랙 파라다이스 로리 외 1편 (0) | 2022.03.06 |
김윤이 시인 / 생은 다른 곳에 (0) | 2022.03.06 |
정선우 시인 / 드라이플라워 외 5편 (0) | 2022.03.06 |
정병호 시인 / 벽의 서시 (0) | 2022.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