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건호 시인 / 슬픈 묘지
단풍나무 아래 세워둔 차가 밤새 무덤으로 변했다 단풍에 덮인 불같이 살다간 어제의 내 묘지 저 집을 짊어지고 비탈길 오르내리던 나는 달팽이의 유령인가 난바다를 표류하다 밤새 무덤이 되어버린 집앞에 선 달팽이가 되어 꽃잎 단장한 무덤을 어루만진다 꿈에서 깨어보니 집이란 게 본시 나를 묻어야할 무덤 어제 묻혔던 봉분을 열자 풀썩 내려앉는 공기 덥수룩한 얼굴 창백하다 웃음 몇 조각 붙어있는 입가에 거친 숨소리 이마에 고랑을 판다 교묘하게 뿌리내린 머리카락 헝클어져 엉킨다 기도를 막는 미완성의 시어들 화사처럼 목을 휘감는다 미라에 몸을 포개자 저절로 걸리는 시동 달팽이 걸음으로 달리는 차창에 새떼같이 날아드는 단풍 멈추는 순간 무덤이 되어버릴 집을 짊어지고 안개 속 질주를 한다
열린시학 2010년 봄호
전건호 시인 / 검침원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 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에돌아 온 길의 경사 어떠한지 엉성한 거푸집에서 삼킨 음식과 한숨도 점검합니다 은밀한 속삭임도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던 순간도 계량기엔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 역주행한 흔적도 점검합니다 과부하 걸린 생애까지 다 검침해 청구할 겁니다 누군가 당신의 삶을 저울질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물론 완강히 거부하실 거예요 하지만 소용없어요 당신의 생애가 저 블랙박스 속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걸 난들 어쩌겠어요
전건호 시인 / 개구리에게 배우다
주식으로 종자돈 날리고 아이들 등록금 납부할 날은 다가오는데 창밖엔 철없는 먹장구름이 장대비를 뿌린다 세상이 절벽같이 막막한 개구리들 몇날 며칠 날을 세워 운다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귀청 떨어지게 우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다가 가만, 저게 무슨 소리던가 개굴에 개는 열 開 굴자는 동굴 窟이란 말씀 아무리 꽉 막힌 절벽이라도 틈은 있을 터 오매불망 더듬어 찾다보면 솟아날 구멍 있다는 얘긴데 오십에야 어렴풋이 귀가 열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저 말씀 지뢰밭을 지나왔던 지난날 죽어도 몇 번은 죽었어야 했으나 천신만고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올챙이 꼬리 떼고 행하는 저 설법 반백이 되어서야 겨우 귀가 뚫려 확철대오 방문 박차고 나선다
전건호 시인 / 담쟁이
무조건 영역을 넓히는 게 아니었다
상처를 덮는가 했더니 어느 날부터 촉수에 빗물을 찍어 수묵산수를 친다
수직의 화폭에 잎새 하나로 새 한 마리 그려내는 둥글기만 한 저 농담
한때 나도 넓은 땅에 금 긋고 위로 오르려 한 적 있었다 눈물 머금고 한숨을 벼루에 갈아 수묵산수를 친 적 있었다
시집<변압기> 2010년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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