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순 시인 / 봉지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봉지를 발로 차며 걷는다 성가시게 발에 와 엉기는 걸 걷어차다가 문득 눈도 코도 없는 나를 담아주었던 어떤 봉지를 생각한다
이 저녁도 혼자서 어두워질 봉지 온몸에 바람 구멍이 난 봉지는 지금 요양원에 붙들려 있다
그쪽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스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겸연쩍으면 코를 만지는 모계의 버릇들을 감추고 싶지만 송곳들은 좀체 구부려지지 않는다
구김 소리 감추고 아닌 척 하지만 꽃들을 베란다에 넘치게 기르고 화사한 옷들을 치렁거리는 건 나 역시 봉지 속 어둠이 깊어간다는 증거다
비닐봉지들이 질긴 건 물기를 참아내기 위해서다 어디에나 뭉클 쏟아져버릴 것들이 얇은 몸을 빌려 신호를 기다리고 길을 건너간다
요양원을 다녀온 날이면 혹 봉지가 따라오지나 않을까 뒤돌아보게 된다
최기순 시인 / 바람에 잎사귀들이
연꽃 호수에 바람이 불자 일제히 잎사귀들을 뒤집는다 장비목 코끼리떼가 한꺼번에 귀를 펄럭인다 멀고 먼 사바나를 향해 대이동을 하나보다
수면 위에는 떨어진 꽃잎들 종이배처럼 떠있다 저들도 몸을 나룻배 삼아 어디든 멀리 흘러가버리고 싶은가보다 나도 커브를 한 번 휙 돌아서 몸을 기울여 이 생을 어제와 오늘을 뒤집어볼 수 있는 것일까 휘파람 노를 저어 떠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저 연밥들 세상의 이런저런 소문 다 듣고도 입 다문 늙은이처럼 눈감은 얼굴 형상을 하고 물 위에 떠서 쭈글쭈글 말라간다
펄럭이던 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묵은 줄기들 덩치 큰 초식동물의 뼈처럼 얼기설기 컴컴한 물 위에 정박 중인 흰 배들 고요하고
둥글넓적한 연잎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집『음표들의 집』2013년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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