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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기순 시인 / 봉지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최기순 시인 / 봉지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봉지를

발로 차며 걷는다

성가시게 발에 와 엉기는 걸 걷어차다가

문득 눈도 코도 없는 나를 담아주었던

어떤 봉지를 생각한다

 

이 저녁도 혼자서 어두워질 봉지

온몸에 바람 구멍이 난 봉지는

지금 요양원에 붙들려 있다

 

그쪽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스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겸연쩍으면 코를 만지는

모계의 버릇들을 감추고 싶지만

송곳들은 좀체 구부려지지 않는다

 

구김 소리 감추고 아닌 척 하지만

꽃들을 베란다에 넘치게 기르고

화사한 옷들을 치렁거리는 건

나 역시

봉지 속 어둠이 깊어간다는 증거다

 

비닐봉지들이 질긴 건

물기를 참아내기 위해서다

어디에나 뭉클 쏟아져버릴 것들이

얇은 몸을 빌려 신호를 기다리고

길을 건너간다

 

요양원을 다녀온 날이면

혹 봉지가 따라오지나 않을까 뒤돌아보게 된다

 

 


 

 

최기순 시인 / 바람에 잎사귀들이

 

 

연꽃 호수에 바람이 불자

일제히 잎사귀들을 뒤집는다

장비목 코끼리떼가 한꺼번에 귀를 펄럭인다

멀고 먼 사바나를 향해 대이동을 하나보다

 

수면 위에는 떨어진 꽃잎들 종이배처럼 떠있다

저들도 몸을 나룻배 삼아 어디든 멀리

흘러가버리고 싶은가보다

나도 커브를 한 번 휙 돌아서 몸을 기울여

이 생을 어제와 오늘을 뒤집어볼 수 있는 것일까

휘파람 노를 저어 떠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저 연밥들

세상의 이런저런 소문 다 듣고도 입 다문 늙은이처럼

눈감은 얼굴 형상을 하고 물 위에 떠서 쭈글쭈글 말라간다

 

펄럭이던 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묵은 줄기들 덩치 큰 초식동물의 뼈처럼 얼기설기

컴컴한 물 위에 정박 중인 흰 배들 고요하고

 

둥글넓적한 연잎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집『음표들의 집』2013년 푸른사상

 

 


 

최기순(崔基順) 시인

1952년 경기 이천 출생. 2001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새」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음표들의 집』이 있음. 현재 ‘오후 4시’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