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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봄 시인 / 백색-이별방정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임봄 시인 / 백색-이별방정식

 

 

당신을 추억해야 한다면

난 여행을 떠날 거야

우기 지난 모로코에 가서 와디를 따라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넘을 거야

 

백조 한 마리가 우물로 내려오면

나는 슬픔을 참느라 길게 늘어난 목에

오래 입을 맞추어야지

 

춤을 출거야, 태양의 흑점 한 가운데서

가볍게 뛰며 경쾌한 왈츠를 추어야지

모로코 하고 읊조릴 때 흐르는 음률을

낮은음자리표로 붉은 카펫에 그려 넣을 거야

 

카사블랑카에 들르면

집을 잃은 군인과 술집 여가수의 이야기가

비처럼 흐르는 영화를 볼 거야

키스신 뒤쪽으로 폭죽이 터질 거야

잘 익은 포도주는 거리에 흥건히 엎질러질 거야

아, 나는 철없이 취할 거야

 

그곳에 가면 푸른 수염을 기른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보다 먼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당신은 이미 늙어 있을 거야

오래 전 당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낙타의 발자국들이 푸르게 피고 있을지도

 

 


 

 

임봄 시인 / 백색의 나라에는 이끼가 자라지 않는다

 

 

종이로 수많은 별들을 오려

하얀 문풍지마다 붙이던 여자

 

한 주먹 분량의 행복한 기억으로

분홍색 꽃무늬 그림을 그리던 여자

 

리어카에 배추와 아기와 햇살을 싣고

바람을 가르며 장터로 가던 여자

 

검은 멍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돈을 세던 여자

 

사과 속살이 마르는 동안

억새 소리를 내며 잠깐씩 울던 여자

 

그 여자의 울음을 꼭 빼닮은

내 늑골 아래 잠든 여자

 

 


 

임봄 시인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시집 『백색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