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경 시인 / 옥탑방 물고기
한 번의 등짐이 네일아트처럼 등에 비늘을 붙였다 비늘은 옥탑방 향하는 층계가 되었다
층계를 오르며 넘어질 때 입안에 고인 핏물이 아가미의 살점을 만들었다 부레를 부풀리는 지느러미는 굴혈의 지팡이가 되었다
개수구로 떨어지는 물비린내 슬금슬금 대처 향해 나아갔다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누수가 있어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멋대로 변질될까 덫을 치기도 했다
가뭄에도 눈비에도 눈물로 단단한 뼈를 온몸에 심어라
느닷없이 달려드는 사막여우처럼 황사 꼬리를 잡고 파란 하늘이 낙타 닮은 옥탑방에 내려앉았다
샤이가*를 던져 주며 꼿꼿한 지느러미와 튼튼한 꼬리를 가져라 하늘 모퉁이 한 조각 잘라 옥탑방 멀리 새끼의 첫 고삐를 만들어 주었다
* 양의 복사뼈로 만든 놀이 기구
정수경 시인 / 아주 오래된 답
용접봉 불꽃이 씨름하는 땀방울을 털어낸다 반으로 접힌 어깨의 시간 반질거리는 바람, 굽이 닳은 작업화 뒤꿈치 지나 투박한 손등에 생긴 골 어루만진다 어금니 꽉 문 입술의 요절과 유리 진열장에 놓인 부장품 끼고도는 초침에는 허기진 깃발 가득하다 노동으로 붉어진 등허리 버텨낸 종아리가 비의 광장을 바라본다 신발 끈 고쳐 매는 침묵들 사물과의 마찰이 부른 열기는 다른 함의가 없다 농담처럼 부주의한 균열을 마시는 블랙커피의 십이월 흠을 읽는 지글거리는 캐럴이 일정하게 이어진다 이명이 인색한 음악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방심한 부분을 닮고 많은 이야기로 채워진 페이지는 무겁다 국화를 사랑했던, 소외된 층계를 오르내리는 관절들 소음으로 조금씩 쓸쓸해져 간다
정수경 시인 / 시클라멘 시클라멘 -도시를 필사하다
나는 나를 질투한다 저온성 무릎을 접어 직립의 감옥을 무너뜨린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햇빛, 죽은 새들의 비행시간 수첩을 버린다
거꾸로 질주하는 핸들의 기적들 꿈의 씨앗을 심는 유리창들 무늬 없는 유리잔과 꽃무늬 물병이 지키는 식탁들
말랑말랑한 시간 버티는 콘크리트는 어둠 속 얼굴들이 잃어버린 목록,
저녁이면 부딪치고 금이 가는 것들은 뼈마디의 연골이 사라지는 순차적 크기
잠을 지운 빈 방들이 상처 난 지느러미 끌고 골목을 떠돈다
오래 충혈된 숨구멍들 그림자 부족의 울음을 대신 울고
환한 어둠이 흘린 고양이 푸른 눈 이중거울 속으로 사라진다
정수경 시인 / 슬픔은 15도로 기울어진다
관목과 잡초로 둘러싸인 북쪽 城, 두렵고 말라붙은 시간들이 당신을 스케치하고 먼지 쌓인 회전판 위에 철사로 뼈대를 세워 거푸집을 짓는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체온을 만진다 희미해지는 콧날을 세우고 입술과 귓불 불러 흉상을 만든다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신성한 불꽃, 격정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열아홉 살이었다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 난 나침반처럼 흔들렸다 그 길은 때때로 망각의 늪으로 이어져갔고, 늪의 끝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실핏줄로 흐르던 당신이라는 햇살과 어두움이었다 붓으로 석고액을 바르고 찰흙을 파낸다 돌가루처럼 떨어지는 한숨을 석고 틀 안쪽에 비눗물 대신 바른다 사랑보다 길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바다였을까 바다를 끌어안은 어둠의 깊이는 늘 그렇게 바닥이 없었다 끓는 청동 물로 빈 바다를 채운다 맨발로 오귀스트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 나는 까미유 끌로델,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당신의 팔에 엉겨도 젖은 몸속에서는 다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성에 낀 정신병원 창밖에는 서른 세 번째 겨울이 15도쯤 기울어진 내 슬픔을 기다리고 있다
정수경 시인 / 달을 기다리는 의자
가지마다 달을 매달고 나무들은 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물을 길어 달의 집을 키울 수 없었으므로 의자의 생은 점점 왼쪽 어깨가 기울었다 절단된 뿌리는 자꾸 목이 마르고 외로움과 수평 맞추느라 등 뒤로 달은 그림자를 늘리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모닥모닥 앉아 놀던 한가한 바람이 왼쪽으로 기울며 미끄러져 내렸다 짧은 의자다리에 걸린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달은 멀미를 했다 바람이 달을 위해 나뭇가지마다 패치를 붙여 주었다 즉각적 효능이 달빛을 지워버렸다 달이 사라진 의자는 영도의 체온에 불과하고 어둠의 검열 기다리던 의자는 언제나 침묵하는 풍경, 달의 무게가 전해오기까지 여백의 시간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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