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나석중 시인 / 시작(詩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나석중 시인 / 시작(詩作)

 

 

갈대는

갈 때가 되었다고 흔들리는 게 아니다

 

바람이

갈대의 혼신을 빌어 유서를 쓰는 게다

 

저 고요의 백사장에 쓰는 바람의 유서가

구구절절 명편으로 죽었던 영혼을 흔든다

 

일생의 최후에 비로소 면목을 드러내는

바람은

 

 


 

 

나석중 시인 / 지갑

 

 

이젠 채우기보다

꺼내 베풀어야 할 때에야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지갑

푼돈 몇 푼으로 견딘 허기진 세월

불평불만 한 번 뱉지 않고

묵묵히 동거해온 지가 어언 20여년

아비는 지갑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아비는 지갑을 잘 모시지 못하고

아비는 그래서 가난한지

지갑을 선물 받을 때

배부른 지갑이 되어달라는 뜻이었겠지만

정작 너를 위해서는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지갑

인제 그만 버릴까 말까 하다가도

딸내미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참을 만져본다

 

 


 

 

나석중 시인 / 후암동

 

 

초인종을 누르면

자동문을 열어주던 당신

당신 배꼽 같던 초인종을 뽁 누르기도 전에

가까운 내 발소리에 철커덕 천당 문 열어주던

예지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시나

방 안에 붉은 대추나무기둥이 빛나던

그 중세기 성채 같던 적산가옥도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집 새로운 동네 낯설은

지금 범인이 범죄 장소를 밟아보듯 보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디 갔나 보이지 않고

술래의 귀에는 소리만 왁자지껄

아직 공소시효公訴時效는

한참 남아 있다

 

 


 

 

나석중 시인 / 단풍 지다

 

 

고요히

허공을 할퀴는 미련인지

아니 별사도 없이

우수수 흩날리는 당신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공중인가

나이테를 셈하기 위하여

일생 얼마나

연두와 초록을 쥐어짰는지

더 이상 수다 떨 일 없고

더 이상 비바람 맞을 일

없다고

그간 수고했다고

이제는 놓아주는 큰 손

 

 


 

나석중(羅石重) 시인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아호: 송재(松齋).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 2004년 월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목마른 돌』, 『외로움에게 미안하다』, 『풀꽃독경』, 『물의 혀』, 『촉감』 『나는 그대를 쓰네』, 『숨소리』와 미니시집(전자) 『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 『그리움의 거리』가 있음. 2019년 성남시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 김제문협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석맥회(石脈會)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