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중 시인 / 시작(詩作)
갈대는 갈 때가 되었다고 흔들리는 게 아니다
바람이 갈대의 혼신을 빌어 유서를 쓰는 게다
저 고요의 백사장에 쓰는 바람의 유서가 구구절절 명편으로 죽었던 영혼을 흔든다
일생의 최후에 비로소 면목을 드러내는 바람은
나석중 시인 / 지갑
이젠 채우기보다 꺼내 베풀어야 할 때에야 옆구리 터져 너덜너덜한 지갑 푼돈 몇 푼으로 견딘 허기진 세월 불평불만 한 번 뱉지 않고 묵묵히 동거해온 지가 어언 20여년 아비는 지갑의 신하가 되지 못하고 아비는 지갑을 잘 모시지 못하고 아비는 그래서 가난한지 지갑을 선물 받을 때 배부른 지갑이 되어달라는 뜻이었겠지만 정작 너를 위해서는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지갑 인제 그만 버릴까 말까 하다가도 딸내미 얼굴이 어른거려서 한참을 만져본다
나석중 시인 / 후암동
초인종을 누르면 자동문을 열어주던 당신 당신 배꼽 같던 초인종을 뽁 누르기도 전에 가까운 내 발소리에 철커덕 천당 문 열어주던 예지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시나 방 안에 붉은 대추나무기둥이 빛나던 그 중세기 성채 같던 적산가옥도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집 새로운 동네 낯설은 지금 범인이 범죄 장소를 밟아보듯 보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디 갔나 보이지 않고 술래의 귀에는 소리만 왁자지껄 아직 공소시효公訴時效는 한참 남아 있다
나석중 시인 / 단풍 지다
고요히 허공을 할퀴는 미련인지 아니 별사도 없이 우수수 흩날리는 당신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공중인가 나이테를 셈하기 위하여 일생 얼마나 연두와 초록을 쥐어짰는지 더 이상 수다 떨 일 없고 더 이상 비바람 맞을 일 없다고 그간 수고했다고 이제는 놓아주는 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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