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영 시인 / 자화상(自畵像)
안다 다소 비겁하다는 거 엎어 버리고 싶은 군대였지만 눌러앉힐까 봐 고분고분했다 다소가 아니다 투사인 양 살다가 애저녁에 산골로 도망 왔다, 와서는 (사는 건 뒷전이고) 허무를 이기려 발버둥이다 비굴까진 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기적으로 변했다 종종 밤에는 혼자 投網, 던지러 간다 (망은 흐르는 수면을 오린다) 별은 멀어 바위에 누워 길게 보아도 멀고 멀어 별빛 비치는 개울에 나 간다 별빛처럼 파닥이는 피라미를 보면서 비겁하게 배를 딴다 (허무를 들어올린 투망은 처박는다) 밤 산이 무섭고 밤의 바람 그늘이 무섭다 고요가 무섭고 새벽 일이 무섭다 비겁하게 책 속으로, 인터넷 속으로 도망간다 고요는 거울 같아서 비겁도 비굴까지도 낱낱하다 달아나서는 못 이기는 고요, 이길 수 없는 고요 비겁은 무서운 착한 마음이다 허무는 이겨도 허무하다 온이로 이기적이어야 거울에 얼굴을 들이댈 수 있다, 고기야말로 제 무게에 맞는 부레를 가졌다
윤관영 시인 / 말, 경마장 가다
말은 말 많은 자를 싫어한다 히히히 힝 말 잔치에서는 구석의 말 없는 놈이 무서운 법 말잔치 히히히 휙 백마 탄 왕자는 얼룩말을 흘겨본다 말 부리는 놈은 땀나고 말 재주 있는 놈은 떨어지게 마련, 말의 교접은 순식간에 공표된다 말 타면 달리고 싶고 말 꼬리 잡는 놈은 뒷발에 걷어차인다 포식자가 덮치기 전에 순식간에 끝나야 하는 말의 교접 히히힝 촌철살인이 예서 나왔다 대물을 받아들이려 제 생식기를 국화빵처럼 옴짝거리는 암말, 말 씀 준비와 말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런 것이다 잔치랍시고 말 허리 자르는 놈은 잘리고 말 머리 돌리는 놈은 제 머리를 돌려 가야 한다 순식간의 흘레라 흐흐흐 그 말을 우습게보지 마시라 안반짝 같은 엉덩이 흔드는 여진이야말로 오래 가는 법, 말 더듬는 놈은 기중 어여쁜 놈 말 바꾸는 놈이야말로 잔치에 아예 참예 못한다 말 장난은 어불성설 초원을 지배하는 말의 눈빛을 보라 아랫배에 숨겨진 겁나는 한 방의 銃身, 말은 재갈 물린 말이 무서운 말이다
윤관영 시인 / 피뢰주 서다
종당에 뜰에 피뢰침을 세웠다 공사장 연장으로는 이름도 이쁜 삽뽀드(support)로 기둥을 세우고 삽뽀드 하면 해외 여행으로는 삿포로로 가고 싶은 그 안에 굵은 전선을 넣고 끝에 철근을 매고 그 위에 알통 같은 소나무 가지로 솟대를 깎아 피뢰침은 섰다 삽뽀드 속에는 삽으로 눈 치우는 듯한 기운이 들어있어 모든 벼락은 이리로 오겠지 벼락은 또 눈이 생기는 그 지점에서 같이 출발해 그렇게 일순간에 빛으로 오는 것 삽뽀드 삽뽀드는 떠받치는 것 마냥 끌어안고 싶은 것 벼락 같은 우주의 기운은 다 이리로 오겠지 비만 오면 비 맞은 뜰처럼 좋아서 벼락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이리로 올 듯해 좋아서
꿈은 솟대로 서서 벼락 맞아 죽을 듯이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문경 시인 / 광야의 문 외 1편 (0) | 2022.03.10 |
---|---|
이령 시인 / 슬픔의 가속 외 1편 (0) | 2022.03.09 |
양소은 시인 / 긍게 외 1편 (0) | 2022.03.09 |
유희선 시인 / 어항과 모빌 외 1편 (0) | 2022.03.09 |
안도현 시인 / 봄날, 사랑의 기도 외 1편 (0) | 2022.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