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 / 봄날, 사랑의 기도
봄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도 봄을 기다렸으나 정작 봄이 와도, 저는 봄을 제대로 맞지 못헀습니다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갓 태어난 아기가 응아, 하는 울음소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듯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사랑해요, 라는 말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하소서 큰 것보다도 작은 것도 좋다고, 많은 것보다도 적은 것도 좋다고, 높은 것보다도 낮은 것도 좋다고, 빠른 것보다도 느린 것도 좋다고,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그것들을 아끼고 쓰다듬을 수 있는 손길을 주소서.
장미의 화려한 빛깔 대신에 제비꽃의 소담한 빛깔에 취하게 하소서. 백합의 강렬한 향기 대신에 진달래의 향기 없는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떨림과 설렘과 감격을 잊어버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몸에도 물이 차오르게 하소서.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안도현 시인 / 나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소은 시인 / 긍게 외 1편 (0) | 2022.03.09 |
---|---|
유희선 시인 / 어항과 모빌 외 1편 (0) | 2022.03.09 |
이미상 시인 / 비너스 외 1편 (0) | 2022.03.09 |
오현주 시인 / 아름다운 노년 외 2편 (0) | 2022.03.09 |
이문조 시인 / 바보들 외 1편 (0) | 2022.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