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선 시인 / 어항과 모빌
보시니 참 좋았던 그 아득한 날들처럼 어항 앞을 떠나지 못하던 날들이 있었다.
일곱 마리의 물고기가 먼지처럼 일어나자 크고 단단한 놈들이 닥치는 대로 새끼를 잡아먹으며 씨를 말렸다.
새끼를 받아본 게 언제였을까? 문득, 어항 속의 물고기와 모빌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한다.
갔던 곳을 되돌아오고 왔던 곳에서 또 되돌아가고
만나를 받아먹던 그들의 끊임없는 불평불만처럼 조금도 새로울 것 없는 지루한 풍경
어항은 물고기들과 함께 늙어간다. 저 물고기들에게도 두려움이 남아 있을까.
렘브란트와 뭉크는 거실에 파묻혀 여전히 자화상을 그리고 나는 세례를 받고 사십 년이 흘러서야 처음 성서 통독을 결심했다.
판관기를 지나 사무엘기로 건너가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피비린내로 물들어 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끊임없이 배반하고 회귀하는 일생
보시기에 참 좋았던 그 날은 다시 올 수 있을까? 탄성을 지으며 물고기 하나하나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던 날처럼
사방은 유리벽, 여러 개로 쪼개진 소리 없는 하늘에 매달려 물고기들은 여전히 모빌 흉내를 내고 있다.
유희선 시인 / 낙인
어느 날 권삼순이 법원에 개명신청서를 냈다 사유서엔 '삼순이 싫다' 단 한 줄 써냈다고 했다 그 후 권삼순은 권다윤이 되었다 감쪽같이 권다윤이 되기 위해 다윤은 삼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갈빗집으로 큰돈 벌어 고향 땅 사고 빌딩도 샀던 삼순이를 방통대 공부 하며 원형탈모를 앓던 삼순이를 폐기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구약을 묻어버리고 앤디 워홀과 앤디 워홀라 사이에서 광란의 파티를 하는 워홀과 일요일마다 교회를 쫗아가던 워홀라 사이 영원한 블랙홀에서 다윤의 역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거의 다 된 시 한 편, 끝을 보는 대신 이면지를 펼쳤다 꽃 진 나무처럼 초록을 뒤집어 쓴 울창한 이름들 속에 기꺼이 파묻혔다. 진달랜지 찔렌지 더듬거리며 축축한 덤불 깊숙이 다윤! 부르면 삼순이 먼저 손을 내민다 삼순이 오래 기다린 그곳으로 다윤은 다시
하게 가고 있다
- 《포엠포엠》2013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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