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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문경 시인 / 광야의 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조문경 시인 / 광야의 문

 

 

춤추는 나에게로 가는

거울은 광야의 문

햇빛의 옷을 입고

슬픔도 없이 작별한다

가장 작아져서

가장 커진

마치 어린 날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처음 대문을 나설 때처럼

 

시계도 귀걸이도

손에 닿으면

내가 나에게로 가는

만약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라면

더욱 아름다운

광야의 문

 

모든 것은

깊으면서도 넓은 곳을 가진

넓으면서도 가득 찬

문이다, 광야로 가는

나도 나에게로 가는

 

 


 

 

조문경 시인 / 향수 여자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그녀

빨간 립스틱에 커다란 링 귀걸이

긴 손톱에 새빨간 메니큐어를 하고

새로 이사 왔냐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향수 냄새 진하다

한여름에도 핫팬츠에 롱부츠를 신고

목이 패인 민소매와 틀어올린 머리

가끔 강아지를 안은 그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곤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다며 웃으며 인사한다

여러 말도 안 하고 꼭 이런 인사말만 하며

여전히 상냥하고 여전히 향수냄새 짙은

늘 혼자 다니는 여자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수군댄다

입술 색깔이 너무 빨갛다느니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는 향수냄새가 너무 짙어

머리가 아파 탈수가 없다느니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궁금해하는

그녀는 언제부턴가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향수'로 통한다

오늘도 마주치자 상냥하게 눈웃음 준다

양손에 저녁 장을 본 봉지를 든 아줌마들 틈이었는데

그녀만 6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는

혼자 장미꽃이다

누가 뭐래도 여전히 향수 냄새 짙은

 

 


 

조문경 시인

경북 상주 출생. 2002년 [삶글]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항상 난 머뭇거렸다』 (2003). 『노란 장미를 임신하다』 (2008). 『엄마 생각』(2013).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