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원죄(原罪)
어머니 나는 짐승 같은 놈이 맞는가 봐요. 아니면 독니가 깨진 유리조각 같이 뾰족한 사악한 뱀 밤마다 골방에서 똬리를 틀고 우는 뱀 슬픔을 허물로 벗으며 허옇게 눈멀어 길게 우는 뱀
내게도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 같은 죄 평생 울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나 봐요. 밤새 울어야 속이 편해지고 맑아지는 마음 그것이 더 나를 슬프게 해 또 울어요.
전방의 옥수수 밭을 지나 한탄강을 지나 개구리 복 입고 전역할 때 함께 비상도로 타다가 죽은 경호 성삼이 김하사 현석이를 그대로 두고 혼자서 후방으로 휘파람 불며 온 것이 나의 원죄인지 나 비린눈물 흘리며 울어요. 순이를 방목하듯 고향에 두고 온 것도 원죈지 울어 뱀처럼 길어진 몸을 채찍으로 가혹하게 나를 후려치는 자학의 밤이면 차라리 좋을 텐데 울기만 해 슬퍼요.
간교하게 울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려는 듯 질 좋은 울음의 명수가 되어 뱀 무늬 같은 징그러운 울음의 무늬로 벽 같은 밤에 똥칠하듯 울음 칠을 하고 있어요.
계간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거친 초원을 내닫는 초식성동물 같아서 높은 산맥을 넘어가는 야크의 굽 같아서 밤새 야크의 등허리에 내리는 눈 같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오후의 카페에 앉아 추억 몇 스푼을 탄 커피를 마시며 호수에 새겨지는 구름이나 새의 깃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낭만의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마차를 타고 방울소리 딸랑이며 언덕을 넘어가지 않고 징검다리 건너서 미루나무 숲을 지나서 신발 흙탕물에 젖어서 가는 내 사랑이어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월광곡을 소녀의 기도를 은파를 듣기 보다 흐린 창문을 열고 낙숫물 소리를 들어서 서럽도록 짙은 풀벌레 소리 들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며 성호를 긋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밤하늘 초롱초롱 별을 보며 그리움 못 견뎌 눈물 글썽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이념서적을 넘기면서 밑줄 긋기보다는 길가의 민들레꽃이나 푸른 사과를 바라보며 1번국도 어딘가 있을 깻잎 같은 추억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창가 아래서 아리아를 부르기 보다는 패, 경, 옥 그리고 명자꽃 누나 수국꽃 동생 칡꽃 이모 싸리 꽃 고모라 부르는 것이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와인을 마시기보다는 한 사발 막걸리를 포크와 나이프로 청춘을 썰기보다는 숟가락 젓가락으로 늦은 밥상 앞에 앉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그래서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사랑아, 네가 곁에 없어야 사랑이라 부른다. 곁에 있으면 부르는 게 수줍어 부르지 못하지만 없을 때만 더욱 다정하게 불러 미안하다. 잉걸불 가슴으로 불러 미안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밤하늘을 향해 우우 불러서 미안하다. 그렇게 내 사랑은 촌스러운 것이어서 사랑아,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늘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계간 『리토피아』 2019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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