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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원죄(原罪)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김왕노 시인 / 원죄(原罪)

 

 

어머니 나는 짐승 같은 놈이 맞는가 봐요.

아니면 독니가 깨진 유리조각 같이 뾰족한 사악한 뱀

밤마다 골방에서 똬리를 틀고 우는 뱀

슬픔을 허물로 벗으며 허옇게 눈멀어 길게 우는 뱀

 

내게도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 같은 죄

평생 울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나 봐요.

밤새 울어야 속이 편해지고 맑아지는 마음

그것이 더 나를 슬프게 해 또 울어요.

 

전방의 옥수수 밭을 지나 한탄강을 지나

개구리 복 입고 전역할 때

함께 비상도로 타다가 죽은 경호 성삼이

김하사 현석이를 그대로 두고

혼자서 후방으로 휘파람 불며 온 것이

나의 원죄인지 나 비린눈물 흘리며 울어요.

순이를 방목하듯 고향에 두고 온 것도 원죈지

울어 뱀처럼 길어진 몸을 채찍으로

가혹하게 나를 후려치는 자학의 밤이면

차라리 좋을 텐데 울기만 해 슬퍼요.

 

간교하게 울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려는 듯

질 좋은 울음의 명수가 되어

뱀 무늬 같은 징그러운 울음의 무늬로

벽 같은 밤에 똥칠하듯 울음 칠을 하고 있어요.

 

계간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김왕노 시인 /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거친 초원을 내닫는 초식성동물 같아서

높은 산맥을 넘어가는 야크의 굽 같아서

밤새 야크의 등허리에 내리는 눈 같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오후의 카페에 앉아 추억 몇 스푼을 탄 커피를 마시며

호수에 새겨지는 구름이나 새의 깃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낭만의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마차를 타고 방울소리 딸랑이며 언덕을 넘어가지 않고

징검다리 건너서 미루나무 숲을 지나서

신발 흙탕물에 젖어서 가는 내 사랑이어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월광곡을 소녀의 기도를 은파를 듣기 보다

흐린 창문을 열고 낙숫물 소리를 들어서

서럽도록 짙은 풀벌레 소리 들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며

성호를 긋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밤하늘 초롱초롱 별을 보며 그리움 못 견뎌 눈물 글썽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이념서적을 넘기면서 밑줄 긋기보다는

길가의 민들레꽃이나 푸른 사과를 바라보며

1번국도 어딘가 있을

깻잎 같은 추억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창가 아래서 아리아를 부르기 보다는

패, 경, 옥 그리고 명자꽃 누나 수국꽃 동생

칡꽃 이모 싸리 꽃 고모라 부르는 것이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와인을 마시기보다는 한 사발 막걸리를

포크와 나이프로 청춘을 썰기보다는 숟가락 젓가락으로

늦은 밥상 앞에 앉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그래서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사랑아, 네가 곁에 없어야 사랑이라 부른다.

곁에 있으면 부르는 게 수줍어 부르지 못하지만 없을 때만

더욱 다정하게 불러 미안하다. 잉걸불 가슴으로 불러 미안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밤하늘을 향해 우우 불러서 미안하다.

그렇게 내 사랑은 촌스러운 것이어서 사랑아,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늘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계간 『리토피아』 2019년 봄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사진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이별 그 후의 날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이 있음.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등 수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상,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시와 경계》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