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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선희 시인 / 배꽃 가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0.

장선희 시인 / 배꽃 가지

 

 

밤의 살결이 궁금하면 달을 봐요 거문고자리 살빛이 투명해지면 빈 나뭇가지에도 옆구리 빌려주지요 그러면 달빛이 넌출넌출 담장을 타고 오르지요 잎잎 딛고 달아나는 바람 소리

 

배꽃 그림자에 달이 지나가요 헛발처럼 배꽃이 떨어져요 달도 배꽃 가지 잡고 흰 눈물 흘려요

 

말 울음소리 가슴골을 달려요 소소리바람에 몸 떠는 이파리 밤을 깨우네요 성근 눈물이 둥근 달을 입어요

 

텃세가 깃을 치네요 놀란 말발굽이 밤을 타작하면 금 간 적막이 유성우를 쫓아가요

 

보검 같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 월담하던 긴 그림자 쟁강쟁강 잘려 나가네요 비단 이부자리 너무 밝아 밤도 저만치 물러나네요

 

보드라운 밤의 살결이 배꽃 가지에 실렸어요

 

 


 

 

장선희 시인 / 푸른 카펫

 

 

카펫 공장에 팔려갈 때가 네 살 이었던가

섬세한 어린 손이 필요해, 방추체를 돌리는 작은 손

깡마른 손이 매듭지은 자리,

꽃이 피어나고 코끼리가 걸어가고

반항을 모른다네

 

아이는 자전거를 타러 가네 어디선가 총성이 들리네 그 때의 나이 12살

 

열 두 시간 노동으로 쓰러진 밤이라네

꿈속에서 겨우 만난 가족들

매듭을 잇고 이어도 갚아야 할 빚은 주인 다리 밑을 뱅뱅 도네

흙먼지 날리는 라호르* 교외 양철지붕 안 카펫 공장

형형색색 실이 감긴 수천 개의 북

꿈속에서도 페달을 밟네

하늘색 보카라 카펫을 짜는 이크발

미래를 꿈꾼 적 없네

놀아본 적이 없는 이크발

방직기 다리에 묶인 채 잠 자는 아이들,

매듭 자르는 칼날만 달빛 속에 번뜩이네

양철지붕 위로 빗방울 춤 추는 소리

족쇄도 그의 발을 묶어 둘 수 없네

이크발, 꼬마 이크발

이제 외치는 걸 알았네

-난 두렵지 않아요

물집 터진 자리에 새살이 돋네

자유의 몸으로 피어나는 들꽃,

 

누군가 그 들꽃을 총으로 겨누었네

자전거가 넘어지네

붉은 카펫이 펼쳐지네

 

* 파키스탄의 지명

 

 


 

 

장선희 시인 / 안개수집법

 

 

칠레의 한 어촌, 안개에서 물을 얻어 쓰지요

높은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플라스틱 물 수집판을 걸어 놓으면

궁금한 안개가 눈망울을 만들어 자박자박 걸어나온다지요

 

오선지엔 침목(枕木)을 걸어놓아야 해요 음악은 몸을 관통하는 힘이 있거든요 때론 뭉클, 한방울 눈물에 고이기도 하지요 땀방울에 스며 물항아리 받쳐들던 젖가슴에서 미끄러져 뱅글뱅글 춤추기도 하지요 여객선 표식이 분명한 공기의 입자들 부드러운 처녀수(處女水) 그 긴 혀로 텅텅 되울림을 잣아올리지요 구멍, 벌거벗은 여자들이 나무로 자란 새벽, 투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개가 발목까지 지워진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는 칠레의 한 어촌, 거기선 물방울도 알알

이 음악으로 맺힌다지요, 자박자박

 

 


 

 

장선희 시인 / 블루홀

 

 

회사 결근계엔 봄이 아프다고 썼다

완벽주의 상사, 봄을 몸으로 읽었을까

 

난 주유부터 했다

그레이트 블루홀

오늘은 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말테야

 

상사의 메시지가 뜬다

언제 돌아올 거냐, 나는 돌아가지 않아요 그는 간섭과 관심을 구별 못하는 상사

봄이 회복 되면 곧, 메시지를 날린다

 

꽃샘추위에 목이 굵어진 동백, 땅 속에서 불쑥 고개를 드는 블루홀, 그걸 막으려고 동백은 온몸으로 뛰어내린다

 

저 거대 구멍을 통과하면 다른 세상이 나타날까

 

한 마리 인어였던 지점을 향해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다리에 비늘이 돋을 즈음

상사의 메시지가 뜬다

봄은 회복됐냐?

 

 


 

장선희 시인

196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크리스탈 사막』(현대시, 2020)이 있음. 제5회 월명문학상 수상. 2020년 울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