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주열 시인 / 눈풍봄경
은속삭인다는듣고있다
흰색 가득 생각이 녹고 있다 눈에 넘쳐 나는 생각에 녹고 있다
먼 데서부터 오고 있는 나를
여전히 오지 않는 사람이 오래오래 끄덕이는 나를
사람없는눈사람이생각하는사람없이 도무지 나는
녹기 전에 사라지리라는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도저히
권주열-시집 <처음은 처음을 반복한다>(파란)에서
권주열 시인 / 멀리를 키우다
멀리를 키워 보고 싶다 애완견처럼 자주 쓰다듬고 싶다
흔해 빠진 멀리, 누구나 밥 먹듯 멀리 더 멀리를 연발하지만 정작 멀리를 가까이 두는 사람은 없다
멀리는 가까이의 말을 듣지 않고 가까이 어디에도 멀리는 없다
읍 장날마다 장터 한구석에 쭈그려 앉은 사람 그가 무엇을 파는지 풀어헤친 보따리를 본 적은 없다 그래도 그가 멀리서 왔다고 한다
멀리를 들고 온 사람 멀리를 파는 사람 적어도 멀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멀리는 얼마나 멀리일까
멀리를 사야겠다
다음 장날에는 반드시 멀리를 사야겠다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권주열 시인 / 목련나무 아래서
피는 것은 지는 것의 흔적입니다 작년을 불쑥 밀어 올린 목련은 목련을 반복합니다 나무 아래서 깜박 졸았던가 집집마다 작은 등불이 꺼지고 어둠살이 내립니다 피고 지는 것이 고요하게 제 흔적을 따라나서는 일 같습니다 여러 번 왔지만 이제야 처음 온 생각이 듭니다 어디에도 없는 마지막처럼 처음은 처음을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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