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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주열 시인 / 멀리를 키우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1.

권주열 시인 / 눈풍봄경

 

 

은속삭인다는듣고있다

 

흰색 가득 생각이 녹고 있다

눈에 넘쳐 나는

생각에 녹고 있다

 

먼 데서부터 오고 있는 나를

 

여전히 오지 않는 사람이 오래오래

끄덕이는 나를

 

사람없는눈사람이생각하는사람없이

도무지 나는

 

녹기 전에 사라지리라는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도저히

 

권주열-시집 <처음은 처음을 반복한다>(파란)에서

 

 


 

 

권주열 시인 / 멀리를 키우다

 

 

멀리를 키워 보고 싶다 애완견처럼

자주 쓰다듬고 싶다

 

흔해 빠진 멀리,

누구나 밥 먹듯 멀리 더 멀리를 연발하지만 정작 멀리를

가까이 두는 사람은 없다

 

멀리는 가까이의 말을 듣지 않고

가까이 어디에도 멀리는 없다

 

읍 장날마다 장터 한구석에 쭈그려 앉은 사람

그가 무엇을 파는지 풀어헤친 보따리를 본 적은 없다

그래도

그가 멀리서 왔다고 한다

 

멀리를 들고 온 사람

멀리를 파는 사람

적어도 멀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멀리는 얼마나 멀리일까

 

멀리를 사야겠다

 

다음 장날에는 반드시 멀리를 사야겠다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권주열 시인 / 목련나무 아래서

 

 

피는 것은 지는 것의 흔적입니다

작년을 불쑥 밀어 올린 목련은

목련을 반복합니다

나무 아래서 깜박 졸았던가

집집마다 작은 등불이 꺼지고

어둠살이 내립니다

피고 지는 것이 고요하게

제 흔적을 따라나서는 일 같습니다

여러 번 왔지만

이제야 처음 온 생각이 듭니다

어디에도 없는 마지막처럼

처음은 처음을 반복합니다

 

 


 

권주열 시인

1963년 울산에서 출생. 2004년 《정신과 표현》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다를 팝니다』(솟대, 2004)와 『바다를 잠그다』(정신과표현,2006)이 있음. 현재 〈빈터〉와 〈수요시 포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