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시인 / 최소한의 겨울로만
열매를 믿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었지
나무의 슬픔을 저장하려 술을 담그고 낙과들이 머문 자리마다 멍울지던 얼룩을 바라본다
유리병에 담긴 겨울 포도들이 귓속의 동굴 속으로 잠겨 들면
꿈이 잠을 벗어나듯 과실은 계절로부터 풀려나오지
지하 창고에는 작은 은수픈으로 조금씩 모아두었던 겨울잠의 냄새가 고여 있고
잠의 녹는점을 알기 위해 한 시 전에는 불을 끄고 손을 모으고 최소한의 생각만을 해
멀리로 오래전의 깊이 속으로
나무가 뿌리를 하염없이 휘저으며 꿈속에 두고 온 깃털을 찾듯이
어제는 너의 두 귀가 밀봉된 날개라고 믿어
귀퉁이가 깨진 세계를 털며 나무에게서 떠나가는 새처럼 열매가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러 갈 때
늦은 배웅에는 긴 연습이 필요했다고
반년간 『상상인』 2021년 창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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