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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용선 시인 / 시를 위한 농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8.

유용선 시인 / 시를 위한 농담

 

 

말이 그대에게 건네지거든

두 손으로 잘 받으시게.

말이 그대를 걸려 하거든

살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게.

 

그리로 건너간 나의 말이

혹여 들고 있기 무겁진 않으신가?

내가 건 어떤 말 때문에

어디 다치진 않으셨는가?

 

건네받은 내 말이 무겁거든

서운치 않으니 그냥 내다 버리시게.

그럼,

진심이고말고.

 

내가 건 말에 찔려 상처 났거든

보복이었으니 그냥 참고 견디시게.

물론,

농담이지 농담.

 

 


 

 

유용선 시인 / 시를 위한 취중 진담

 

 

자다 깨어선

이 마음 밀어 넣을 무엇을

물끄러미

아주 쓸쓸하니

노려본다. 왜 하필 나는

물끄러미 보면서도

노려보는 건지.

쓸쓸하면서도

노려보는 건지.

무엇에

무엇 속에

마음을 밀어 넣는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하마하마

언젠가는 눈을 순히 뜨고서도

누군가의 눈동자 속에

누구의 가슴 속에

나를 밀어 넣을 날이

거기서 살뜰히 살아 낼 날이

있으리라 믿어 본다.

 

그러니 이 밤엔

눈을 감을 수밖에,

다시.

 

 


 

 

유용선 시인 / 시와 퇴고

 

 

혀와 이빨을 퇴화시키고

뼛속을 비워 내고

두 다리에 붙은 살갗을 아낌없이 덜어내고

앙상한 뼈대를 깃털로 감싸고

새는 난다지.

 

맛을 포기하고

무게를 덜어낸 보답으로

나는 새라지.

 

 


 

 

유용선 시인 / 여우나무

 

 

늙는 거 겁나지라

죽는 것보다 더 겁나지라

 

허리 굵어져 날 피하고

목, 팔다리, 배에 주름살 생겨 날 피하는

그 여자 손톱자국

살갗에 새긴 채

그 여자 대신 날 만나 주는

아직 덜 늙은 저 나무

그 앞에서 살짝

술에 취하던 붉은 여시 같던 여자

 

나를 피하지 않아도

어쩌면 내가 못 알아볼지도 모를

여우나무 그

그늘 밑 그 여자

 

더 늙으면 피하지 않겠지

더 늙으면 되레 알아보기 쉽겠지

그 때까지

여우나무 함께 늙어 주겠지

 

 


 

 

유용선 시인 / 이장님의 메타포

- 오탁번 '폭설'에 부침

 

 

산간 마을에 눈이 왔다.

눈이 꽤 왔다.

입 걸진 우리 이장님 말씀하시길,

  - 주민 여러분,

    눈이 좆나게 옵니다.

오호라, 활유이다.

좆이 달려도 눈은 희고 창백하구나.

허나 뜨겁게 끓는 눈이다.

 

그 다음날도 눈이 왔다.

눈이 엄청 왔다.

입 걸진 우리 이장님 말씀하시길,

  - 주민 여러분,

    눈이 또 옵니다.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닙니다.

역설을 이용한 과장이다.

좆이 되었던 눈은

이제 평범 그 이상의 좆이 되었다.

 

그 다음날도 눈이 왔다.

눈이, 정말이지, 무섭게 왔다.

입 걸진 우리 이장님 울상이 되어 말씀하시길,

  - 주민 여러분,

    이제 우린 좆됐습니다.

    좆돼버렸습니다.

아아, 메타포다.

물아일체의 비극적 은유이다.

 

 


 

유용선 시인

1967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졸업. 대학 재학중인 1992, 1993년 두 권의 시집 상재. 이후 문예교육 및 독서지도 연구에 전념. 2004년 문단활동 재개. 2006년 제1회 <시와창작 문학상 > 수상. 2006년 시집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시창기획시선. 1993년 시집 『잊는 연습 걷는 연습』, 독서학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