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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형기 시인 /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7.

이형기 시인 /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 Langerhans islets) : 췌장에 불규칙하게 생긴 섬(島) 모양의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파울 랑게르한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이형기 시인 / 식인종의 이빨

 

 

굴을 한 접시 담은 그대 허벅지

한 오백 년 달빛이 밴

식인종의 이빨이 그대를 베문다.

베물어도 미끈덕 빠져 버리는

한 마리 파충류

빈 접시 위에

그대는 그림자가 되어 눕는다.

아니 무수한 파충류가 기는

진창이 되어 그대로 눕는다.

진창에 박힌 식인종의 이빨

한 오백 년 벼르고 벼른

나의 정사는 몽정으로 끝난다.

 

 


 

 

이형기 시인 / 면도

 

 

면도를 한다.

수염이 아니라 뭉툭한 입술

입술 뒤에 숨은

교활한 혓바닥을 슬쩍 눌러 버린다.

 

슬쩍

그러나 깊이 전류(電流)처럼 뻗히는

잔인(殘忍)한 청결감(淸潔感)

 

미처 아픔을 느끼기 전

미처 피가 배 나오기 전

말이 미처 말 되기 이전의

말의 그 속살의 단면(斷面)

 

흐려질라 햇빛을 막아라

빛없는 곳이라야 제빛이 살아나는

위험한 유혹이다 그것은

유혹에 끌려 빗나가는 손

아니 나의 고의적(故意的) 실수

면도를 한다. 수염이 아니라

혓바닥이 아니라 말을 민다.

 

 


 

 

이형기 시인 / 나무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이형기 시인 / 앉은뱅이꽃

 

 

앉은뱅이꽃이 피었다

작년 피었던 그 자리에

또 피었다

 

진한 보랏빛

그러나 주위의 푸르름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풀꽃

 

이름은 왜 하필 앉은뱅이냐

그렇게 물어도 아무 말 않고

작게 웅크린 앉은뱅이꽃

 

사나흘 지나면 져버릴 것이다

그래그래 지고말고

덧없는 소멸

그것이 꿈이다

꿈이란 꿈 다 꾸어버리고

이제는 없는 그 꿈

작년 그대로 또 피었다

 

 


 

 

이형기 시인 / 죽지 않는 도시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든 스트랄드브라그* 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합성의 디엔에이 주사 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 스트랄드브라그 :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영생불사 종족의 이름

 

 


 

 

이형기 시인 / 저 바람 속에서

 

 

귀를 기울이면 바람소리 들린다

이제는 철 지난 늦가을 바람

부질없이 울어대는그 헛된 소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웅장한 기념탑

탑을 에워싸고 수많은 군중들이 외치는

승리의 환호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그 소리를 불러내는 것

온갖 주검들의 생전의 모습이

환상이기에 더욱 생생하다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여전히 무인벌판

무성한 억새 시들어 나부끼는

저 바람 속에는

 

깃발도 있다

훈장도 있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모가지도 있다

 

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

돌아가는 날개 없는 팔랑개비

 

비어 있는 소용돌이가 있다

 

 


 

 

이형기 시인 / 하운(夏雲)

 

 

해안선을 따라

그 둘레만큼 커다란 어망을 던진다.

등허리가 밖으로 비어져 나와

육중하게 몸을 뒤트는 대어

그 비늘에 찬란한 금빛이 흩어질 때

바다는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놓치지 말아라

힘껏 당겨라

아니 뛰어들어라 뛰어들어라

빙빙 도는 바다

곧추서는 바다

숨찬 뒤범벅

가슴에선가 아랫배에선가

불끈 솟는

아아 욕망의 하운(夏雲)

구름따라 바다는 돌연 승천한다.

 

 


 

이형기(李炯基) 시인 (1933~2005.2.2)

1933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49년 《문예》誌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비오는 날〉이, 1950년에 〈코스모스〉, 〈강가에서〉 2편의 시가 추천완료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적막강산(1963)』이후 『돌베개의 시』, 『풍선 심장』, 『보물섬의 지도』, 『심야의 일기예보(1990)』 등과 시선집 『그해 겨울의 눈)』, 『오늘의 내 몫은 우수 한 짐』 그리고 평론집 『감성의 논리』, 『시와 언어』 등이 있음. 한국문학가협회상, 문교부문예상, 한국문학작가상, 부산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