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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후 시인 / 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7.

김경후 시인 / 툭

 

 

그건 젖은 나무 문이 주저앉을 때

그건 가슴뼈를 움츠릴 때

그건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소리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서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고무줄 삭아 끊어질 때

나는 소리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이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내가 나를 뚫어지게 보려고

진흙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젖지 않은 나무 문은 내지 못할 소리

 

 


 

 

김경후 시인 / 책 벽

 

 

바람 몰려드는 편에 책을 쌓는다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여기, 북편

 

욱신욱신 쓸데없이 손목이 나갔다

어디로?

 

할머니는 가묘 자리를 보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도서관은 열지 않는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는 넓다

그 사이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북편에는 카프카, 비어 있는 곳엔 에코 다음에 에코

 

손을 힘껏 뻗는다

성장판은 닫혔는데 닿는다

 

비어 있는 곳

북편 책 벽

 

벽에 기댄 책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지

아무도 읽지 않지

 

거기서 한 걸음 더 거기

나는 등뼈를 기댄다

바람 부는 곳은 비어 있는 곳

 

 


 

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문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가 있음.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