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나영 시인 / 이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7.

김나영 시인 / 이불

 

 

아이 둘 순산한 내 몸엔 늘 찬 기운이 돈다.

마음의 온기도 차츰 빠져나가고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곧 중학생이 될 아들 녀석이 내 배 위에 찰싹 옮아붙는다.

녀석의 어리광이 때때로 나를 귀찮게도 하지만

제 몸과 내 몸이, 제 피와 내 피가 서로 부르는 걸

아무도 벌려놓을 수 없는 이 간격을 어쩔텐가.

아들의 몸무게와 온기가 내 몸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온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견딜만한 무게와

가장 따뜻한 온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아 따뜻해, 너도 따뜻하냐

내 평생 이렇게 너를 덮고 살련다

너는 내 살과 피로 부풀려 만든 이불 아니겠냐

이 세상에 너 만한 온기가 어디 또 있겠냐

끝까지 나를 덮어다오.

 

 


 

 

김나영 시인 / 그리움이 익어가는 거리

 

 

섬과 섬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섬과 섬 사이 오리 한 쌍이 지나갑니다.

나룻배 한 척이 지나갑니다.

섬과 섬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섬 이쪽과 섬 저쪽으로 갈매기가 바람의 사연을 물어다 나르고

섬쑥부쟁이가 피었다지고 피었다지곤 합니다.

노을이 하루의 끝을 말아 쥐고 둥글게 번져 가는 시간

섬과 섬 사이 최선의 거리가 발갛게 익어갑니다.

 

 


 

 

김나영 시인 /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덧니 하나 삐딱하게 머리 틀고 있던 시절 교과서 밑에서

킥킥 훔쳐보던 만화책이 아니었더라면 만화경 같은 세상이

내게 농을 걸어 올 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때 책가방 안에 딱지를 슬쩍 숨겨오지 않았더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생의 난장 한 가운데서

배 딱 내밀고 버티는 힘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눈물 찔끔찔끔 흘리면서 아껴서 빼던 젖니, 이빨이

흔들릴 때마다 치과로 곧장 달려갔더라면 잇몸 사이로 알싸

하게 퍼지는 고통이 서로 허리를 배배 꼬고 있는 자웅동체란 걸

몰랐을 것이다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때론 별책부록

안에 더 재미있는 페이지가 숨어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전후좌우 흔들리면서 내 중심이 들쭉날쭉 자리 잡아 가고

있던 것을 몰랐을 것이다

 

 


 

 

김나영 시인 / 현관문

 

 

싫어! 더 늦게 들어 올거야!

쾅!

 

니들끼리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봐!

쾅!

 

엄마 마음만 마음이야 내 마음은 없는 줄 알아!

쾅!

 

내 이놈의 집구석 다시 들어오나 봐!

쾅!

 

니 맘 꼴리는 대로 한번 해 봐!

쾅!

 

개자식!

쾅!

 

한껏 부풀어 오르는 공기압,

집안 모서리가 부르르 떤다

이성의 간지처럼 붙어 있는

오래된 저 완충장치

 

-시집 '수작'에서

 

 


 

 

김나영 시인 / 모래시계

 

 

1.

2016년 5월 8일 오전 2시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3층짜리 주택 옥상에서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국 국적 남성 A씨(31)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 여성 L씨(26)가 추락해 숨졌다. 두 사람은 옥상 난간에서 키스를 하다가 L씨가 밑으로 떨어졌고, A씨가 L씨를 잡으려다 함께 추락했다. 두 사람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 <Yes! Top News>, 《YTN》

 

2.

애도는 못하겠어, 박수를 칠 뻔했어, 아무리 살아도 나는 저 커플의 키스 체위 근처에도 못 미칠 거야, 앞뒤 가리지 않았어, 진정 미친 거지, 온몸을 걸고 키스해 봤나 저들처럼, 엉겁결의 추락사든 육욕이든 사랑이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난간 입술, 그 달콤한 난간에서의 최후, 최선이란 저런 것이지, 그 순간  만큼은 코리아드림도 이태원의 불나방 같은 생활도 저 멀리 던져 버렸을, 별도 달도 뜨지 않는 옥상 난간쯤이야 문제도 아니었을, 오직 키스의 각도로 환하게 빛났을 그 난간은 얼마나 아찔한 높이였을까, 지상으로 추락할 때 함께 공유했던 그들만의 제국은 얼마나 붉게 빛나다가 으깨졌을까

 

3.

앞 베란다든 뒷 베란다든 넘쳐나는 게 난간인데, 우리 집 난간에 화분이 허리 터지게 자리다툼을… 난감하네, 매일 밤 남실남실대는 달빛이 우리 집에 와서 다 죽네, 나도 한때 눈꺼풀에 콩깍지 쓰고 난간 위를 걷던 고양이였지, 좀 더 짧아도 좋았을 치마는, 좀 더 붉어도 좋았을 립스틱은, 선 하나 넘지 못해 미수에 그치고 말았던가, 내 영혼의 비계를 밟고 숨 가쁘게 밀착해 오는 느-으윽대 같은 숨결 하나 없어, 나 낭패狼狽의 허리를 더듬네, 남아도는 난간에 허리 한 번 늘씬 걸치지 못하고, 사철 푸르딩딩한 불구처럼

 

 


 

김나영 시인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예술세계》를 통해 등단.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왼손의 쓸모』(2006, 천년의 시작), 『수작』(2010, 애지)이 있음.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한양대학교 출강.961년 경북 영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예술세계》를 통해 등단.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왼손의 쓸모』(2006, 천년의 시작), 『수작』(2010, 애지)이 있음.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한양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