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시인 / 이불
아이 둘 순산한 내 몸엔 늘 찬 기운이 돈다. 마음의 온기도 차츰 빠져나가고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곧 중학생이 될 아들 녀석이 내 배 위에 찰싹 옮아붙는다. 녀석의 어리광이 때때로 나를 귀찮게도 하지만 제 몸과 내 몸이, 제 피와 내 피가 서로 부르는 걸 아무도 벌려놓을 수 없는 이 간격을 어쩔텐가. 아들의 몸무게와 온기가 내 몸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온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견딜만한 무게와 가장 따뜻한 온기를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아 따뜻해, 너도 따뜻하냐 내 평생 이렇게 너를 덮고 살련다 너는 내 살과 피로 부풀려 만든 이불 아니겠냐 이 세상에 너 만한 온기가 어디 또 있겠냐 끝까지 나를 덮어다오.
김나영 시인 / 그리움이 익어가는 거리
섬과 섬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섬과 섬 사이 오리 한 쌍이 지나갑니다. 나룻배 한 척이 지나갑니다. 섬과 섬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섬 이쪽과 섬 저쪽으로 갈매기가 바람의 사연을 물어다 나르고 섬쑥부쟁이가 피었다지고 피었다지곤 합니다. 노을이 하루의 끝을 말아 쥐고 둥글게 번져 가는 시간 섬과 섬 사이 최선의 거리가 발갛게 익어갑니다.
김나영 시인 /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덧니 하나 삐딱하게 머리 틀고 있던 시절 교과서 밑에서 킥킥 훔쳐보던 만화책이 아니었더라면 만화경 같은 세상이 내게 농을 걸어 올 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때 책가방 안에 딱지를 슬쩍 숨겨오지 않았더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생의 난장 한 가운데서 배 딱 내밀고 버티는 힘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눈물 찔끔찔끔 흘리면서 아껴서 빼던 젖니, 이빨이 흔들릴 때마다 치과로 곧장 달려갔더라면 잇몸 사이로 알싸 하게 퍼지는 고통이 서로 허리를 배배 꼬고 있는 자웅동체란 걸 몰랐을 것이다
그때 만일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더라면 때론 별책부록 안에 더 재미있는 페이지가 숨어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전후좌우 흔들리면서 내 중심이 들쭉날쭉 자리 잡아 가고 있던 것을 몰랐을 것이다
김나영 시인 / 현관문
싫어! 더 늦게 들어 올거야! 쾅!
니들끼리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봐! 쾅!
엄마 마음만 마음이야 내 마음은 없는 줄 알아! 쾅!
내 이놈의 집구석 다시 들어오나 봐! 쾅!
니 맘 꼴리는 대로 한번 해 봐! 쾅!
개자식! 쾅!
한껏 부풀어 오르는 공기압, 집안 모서리가 부르르 떤다 이성의 간지처럼 붙어 있는 오래된 저 완충장치
-시집 '수작'에서
김나영 시인 / 모래시계
1. 2016년 5월 8일 오전 2시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3층짜리 주택 옥상에서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미국 국적 남성 A씨(31)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 여성 L씨(26)가 추락해 숨졌다. 두 사람은 옥상 난간에서 키스를 하다가 L씨가 밑으로 떨어졌고, A씨가 L씨를 잡으려다 함께 추락했다. 두 사람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 <Yes! Top News>, 《YTN》
2. 애도는 못하겠어, 박수를 칠 뻔했어, 아무리 살아도 나는 저 커플의 키스 체위 근처에도 못 미칠 거야, 앞뒤 가리지 않았어, 진정 미친 거지, 온몸을 걸고 키스해 봤나 저들처럼, 엉겁결의 추락사든 육욕이든 사랑이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난간 입술, 그 달콤한 난간에서의 최후, 최선이란 저런 것이지, 그 순간 만큼은 코리아드림도 이태원의 불나방 같은 생활도 저 멀리 던져 버렸을, 별도 달도 뜨지 않는 옥상 난간쯤이야 문제도 아니었을, 오직 키스의 각도로 환하게 빛났을 그 난간은 얼마나 아찔한 높이였을까, 지상으로 추락할 때 함께 공유했던 그들만의 제국은 얼마나 붉게 빛나다가 으깨졌을까
3. 앞 베란다든 뒷 베란다든 넘쳐나는 게 난간인데, 우리 집 난간에 화분이 허리 터지게 자리다툼을… 난감하네, 매일 밤 남실남실대는 달빛이 우리 집에 와서 다 죽네, 나도 한때 눈꺼풀에 콩깍지 쓰고 난간 위를 걷던 고양이였지, 좀 더 짧아도 좋았을 치마는, 좀 더 붉어도 좋았을 립스틱은, 선 하나 넘지 못해 미수에 그치고 말았던가, 내 영혼의 비계를 밟고 숨 가쁘게 밀착해 오는 느-으윽대 같은 숨결 하나 없어, 나 낭패狼狽의 허리를 더듬네, 남아도는 난간에 허리 한 번 늘씬 걸치지 못하고, 사철 푸르딩딩한 불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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