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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행은 시인 / 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7.

권행은 시인 / 틈

 

 

고백하자면

당신이 찾아오는 틈과 틈 사이에서

눈 코 입은 마그마처럼 흘러내려

이런 것들이 바로 시인가 생각하면서도

틈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게 고질적인 습관이야

 

빈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틈

꽃과 무덤과 별들의 누대가 조용히 풍장되는 틈

우주 먼 곳에서부터

게으른 내가 나를 찾아 유기하는 틈

틈이 생겨서 어둠에도 용케 싱싱한 눈이 쌓이지

 

나는 즐거이 킬 힐을 신고 틈 사이를 위태롭게 걷지

별 볼 일 없는 틈새에 항상 당신이 있어서 라고

괄호를 치며 걷고 있지

다리 사이로 순환하는 틈, 혹은 괄호의 바깥

아파트 벽 틈에서

결연한 그늘이 탈구되어 나올 때

말할 틈도 없이

옹색하고 비좁은 말의 통로는 막히고

 

그 사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음,

소음이 전부인 아파트의 무게로 킬 힐도

굽이 닳아 낮아지지

굽이 납작해지는 킬힐도 킬힐일까

뽀족한 햇살이 그늘로 납작해지는 하루도 하루일까

종일 틈의 마법에 걸려 낡아가는 당신도 당신일까

 

말없이 낡아가는 아파트 벽을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을 나의 춤이라고 주문처럼 외우면

기억 속의 틈이

성큼

보일까,

 

싱싱한 당신, 담쟁이 이파리 같은 시가 보일까

 

-<열린시학> 2014, 봄호

 

 


 

 

권행은 시인 / 서랍 속의 다섯 시

 

 

 내가 아직 어린 나무였을 때

 나는 초록기차를 타고 길을 떠났지

 그때부터 내 생각은

 끝없는 질문의 숲길

 새벽을 매단 잎사귀들로 두 줄 평행선을 긋곤 했지

 

 나는 싱그러운 잎사귀들의 발성을 받아먹었지

 아직 휘어지지 않은 모국어의 풍경을 잎맥에 새기며

 여러 해 동안

 심장의 두근거림을 빗방울에 매달았지

 

 감정의 가지들에 붉은 물이 들던 날

 나는 예고 없이  또 다른 기차를 타고 떠나야 했지

 따스한 온기에서 최대한 멀리,

 모르는 외국의 플랫폼을 지나

 설국의 슬픔을 실은 기차를 탔지

 

 나의 음악은 주술에 걸린 층층나무가 되어

 미처 떨구지 못한 낙엽의 길을 달렸지

 가령 나이테에 어둠의 냄새가 녹아 든 저녁에는

 공중에 별을 박듯 흔들리는 가지에 오래 된 눈꽃의 몽유를 박았지

 

 잎 잎의 열쇠가 서랍을 여닫는 선로의 침목은 두 줄,

 길들여지지 않은 질문의 색은 푸르러서

 여전히 기적소리는 일생의 바깥으로 자라고

 기차는 다섯 시에도 저 혼자 떠나지

 여러 개의 서랍을 덜컹거리며

 불면의 수피를 되돌려 감으며

 

-《시와 표현》 2013년 가을호

 

 


 

권행은 시인

1962년 전남 광양 출생. 2006년 《미네르바》 신인상으로 등단. 2013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