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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덕규 시인 / 밥그릇 경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7.

이덕규 시인 /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2004년 현대시학작품상 수상작)

 

 


 

 

이덕규 시인 / 어처구니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이덕규 시인 / 숙박계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 이덕규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2003)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등이 있음. '현대시학작품상', '시작문학상', 2016. 제9회 오장환문학상.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 경기민예총 문학위원장을 역임. 경기민예총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