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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만섭 시인 / 아침과의 대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7.

이만섭 시인 / 아침과의 대화

 

 

참새가 첫 손님으로 왔다.

가벼움을 입증하듯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어둠에서 건너와 제자리에 든 것들 가운데

창문은 반듯한 습관을 지녔다

맑은 눈빛으로 사방을 투명하게 비추니

착하게 확인된 자리들,

 

수분을 비워낸 화병에 물을 건네준다.

화병의 꽃은 열 번이면 열 번 미안함뿐이다.

내 좋자고 가지 꺾인 채

저렇게 긴 목 늘어뜨려 웃어야 하니

새삼 위로의 말을 생각하고

 

새벽을 달린 조간신문이 당도한 테이블 위에도

밤사이 자릴 지켜낸 물컵을 거두어

새로운 하루를 기꺼이 준비하며

 

물소리, 그릇 부딪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모두 제 거처에서 귀 마중 드는데

 

차라도 한 잔 권하듯

잠시 자릴 비켜주는 소파는

먼동을 건너온 문밖의 햇살을 곁에 앉힌다.

 

 


 

 

이만섭 시인 / 견디지 못해

 

 

폭우에 축대 무너져

토사 흘러내린 자리에 놀란흙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흙들은 감춰놓은 속을 드러내려

절벽을 뛰어내렸나,

 

견디지 못해 고백하는 것들,

견디지 못해 뛰쳐나가는 것들,

견디지 못해 자폭하는 것들,

 

꽃나무는 꽃봉오리를 견디지 못해 꽃을 피우고

꽃은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해 낙화하는가,

 

산다는 것은 생이라는 꿈에서 깨어

고통을 겪는 거라지만, 그런 밤을 견디지 못해

가물거리는 불빛이 있다.

 

내 막막함은 해와 달을 지나

후일(後日)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불망(不忘)이란 이름을 좇아 먼 길을 가고 있으니

 

세월의 풀숲 우거졌어도 풀꽃들에 길 밝히며

반성 없이 길을 가는 나는

견디지 못하는 아득함 때문인가!

 

 


 

 

이만섭 시인 / 울고 있는 사람

 

 

누가 울고 있다

그의 앞섶에 뒤란이 엎질러진 듯

꺼이꺼이 흐느끼고 있다.

거울을 깨뜨린 것일까,

비망록을 잃어버린 것일까,

먼 길 초행에 구두를 잃어버린 것일까,

저 안간힘은,

지나던 길 멈춰 세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훔쳐보듯

울음소리가 흔들어 깨운 것들, 사방에서 채근하고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항변하지만

소리는 건너와서 돌아가질 않는다.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나누어 갖는 비애를 무어라 할 것인가,

귀는 그렇게 서러워진다.

마음은 그렇게 물든다.

 

 


 

 

이만섭 시인 / 꽃게와 진흙밭

 

 

꽃게는 푸른 다리로

진흙밭을 가꾼다.

 

물컹한 모서리들 무너뜨리며

겹겹이 두른 검은 흙에 구름 피워가며

생의 무늬를 짠다.

 

바위에 이끼 살면 바위 깊어지듯

진흙에 꽃게 사니 진흙은 꽃처럼 피어나고

누가 보아도 진흙밭은 진흙밭인데

꽃게 사는 세상인 것을,

 

길을 나서면

진창으로 난 포근한 오솔길이여,

등딱지에 꽃 짊어지고 가니

가도 가도 만발한 꽃나무 숲,

 

생이 차지다.

이런 궁리가 돈독하다.

 

 


 

 

이만섭 시인 / 투명의 형식

 

 

유리창을 통과해온 푸른 하늘은

한 장의 코발트 모조지

공중이 날아가는 새를 스케치한다.

 

새는 그대로 굳어진 박제표본처럼

정지된 사물이 되어 있다.

 

허공에 도드라진 발도

햇빛이 투각으로 빚어놓은 물채,

활짝 편 날개 밑에 가지런히 뉘인 채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다.

 

새의 흰 깃털이 햇빛에

뭉게구름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저와 같은 꿈결이라면 파란 하늘은 머지않아

호수가 될 수 있겠다.

 

하늘은 더욱 선명해져 불어오는 바람을

새처럼 공중에 그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새를 깨우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

유리창도 커튼을 내리지 못하고,

 

명징한 빛의 선물을

일목요연의 눈길에 바치듯

창에 붙어 서서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이만섭 시인

1954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