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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만호 시인 / 수유리(水踰里)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7.

장만호 시인 / 수유리(水踰里)에서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장만호 시인

1970년 전북 무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와 同 대학원을 졸업.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水踰里에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무서운 속도』(랜덤하우스, 2008)가 있음. 김달진 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경상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