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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사랑, 지난날들의 미몽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7.

이령 시인 / 사랑, 지난날들의 미몽

 

 

밤보다 깊은 새벽

하늘빛은 어둠의 휘장을 둘러 되레 뽀얀 신부 같아

사방 축복의 고요와 적멸은 청사초롱 한데

나는 자다 깨다 문득 비끄러매진 인연의 매듭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골똘한 조막 손 별이 어둠을 그러모아

키 작은 지붕들을 덮어주고

지붕아래 누운 고단했던 이들의 하루를 다독이며

지우고 다시 쓴 문장처럼 반짝일 때

 

녹아내리는 촛농 같아서

뜨겁지만 잡으려 들면 금방 식는 게 사람사이이라고

데일 듯 타오르다 금방 식어버린 인연들이 몇이나

내 불면의 밤과 함께 했던가.

 

사랑은 때로 저 혼자 타오르는 불이었기에

이제 타다만 시간의 불씨를 쟁여

마음 빚지고 가는 일

지나간 것들의 변명에 기대어

더는 상처라 부르지 않을 일 ​

 

어떤 사랑도 어둠 없이 빛나진 않았다

어떤 서사도 밤의 서정 속에선 가지런한데

나 왜 이러고 있나

 

빙산의 일각에 난파된 배처럼

도사린 빙벽을 뒤늦게 발견한 조난자처럼

모든 난항(亂杭)을 웃으며 건너가리라 다짐하는몽

환의 산책자처럼

 

계간 『문예바다』 2021겨울호 발표

 

 


 

 

이령 시인 / 나무와 나 그리고 그림자와 풍경사이

 

 

죽장에서 기계로 넘어가는 언덕배기

거기 노거수 은행나무 한그루 있다

암수딴그루, 홀로 아름드리다

 

멀고도 멀었던 내가

너무 가까워서 섧고 서러웠던 그대를

가닥가닥 눈부신 추억과 적막을

머리로 가슴으로 후들거리는 기억을 몰 수렴해서

이곳의 익어가는 풍경이라 할까

 

축진 바람을 물고 그늘진 나무 사이

이파리와 가지를 직조하는 햇살 사이

구름의 끝을 물고 날아오르는 조막새가 남기고 간

저 파동과 파문 사이

세월이라는 갈피를 끼워 넣다가

불쑥, 울컥 거린다

 

너무 먼 나와

가장 가까운 당신을 데려와

우리라는 내력으로 물 든 적 있다

 

나무의 농익은 자태가

산마루를 다 품고 선 저 풍만한 황금빛 여유가

어디 한 철의 그늘로만 완성되었을까

그림자 깊어 빛나는 그림이 될 때까지

온 몸으로 말씀을 채록한 나무 아래서

부재로만 아름다웠던 우리라는 내력과

그대라는 자장에서 오래도록 흔들렸던 나를 데려오자

환하다. 나조차 풍경이 된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20년 가을호 발표

 

 


 

 

이령 시인 / 평안, 장례식장

 

 

잠, 죽는 연습이라 했다

 

오래된 연습을 실현하며

한 생이 깊은 잠에 들었다

 

사람이 가고 사람이 오고...

 

몰각 하는 어스름 추억을 더듬으며

오가는 이치를 끄덕여야만

웃으며 선뜻 들어설 수 있는 평안,

 

상주의 곡소리 너머 장례식장 추모객들이

소주와 마른안주를 앞에 놓고 매캐한 슬픔을 키질 할 때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담담하다

 

대화 꽃 파다해 망자의 내력조차 흥성거리는 평안,장례식장 1287호.

 

그는 어떤 생을 살아내서, 살아간 일 벅차

저리도 부산한 잠결을 견디고 있을까

죽음을 베껴 애잔, 을 연출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저 오늘의 평안을 지키려고 누군가는 잠들고 또 누군가는 깨어있는가

슬픔도 살아있는 자들의 욕망이고

망각도 살아있는 자들의 권능이라는 생각

죽음을 경유한 삶의 갱신을 축복하며부의함 앞에서 또 누군가 혼몽처럼 예를 보태고 있다

 

월간 『모던포엠』 2020년 10월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동국대 법정대학원 졸업.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2015년 한중작가 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출간. 시집으로 『시인하다』와 『삼국유사대서사시ㅡ사랑편』 그리고 기타 저서로는 『Beautiful in Gyeongju-문두루비법을 찾아서』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문학동인Volume 고문,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북체육회 인권상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