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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성수 시인(서울) / 촌노 김노인의 상경기(上京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7.

정성수 시인(서울) / 촌노 김노인의 상경기(上京記)

 

 

봉천동 산꼭대기 달동네.

둘째 아들네 집에 와서

어젯밤 쇠주 한 잔 거하게 마신 김노인은

뒤가 급해 공동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칸칸마다

주먹만한 자물통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미친놈들,

누가 거름을 퍼갈 깨미 쇠때를 채워 놔?

이 드런 놈들아, 내가 안 싸고 말지.

그런 드런 짓은 않는다"

 

김노인은 침을 택 뱉고 돌아섰다.

 

 


 

 

정성수 시인(서울) / 배롱나무꽃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정성수 시인(서울) / 개나리꽃, 눈 뜨고 순금빛으로 죽고 싶어라

 

 

노오란 병아리떼

나래 펴 들고 고개 들고

해를 쪼아

부리 끝에 부서져 날리는

저 분분한 노른자위 가루들

지구 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려

참 눈부신 속살로 흔들리며

내 알몸을 포옹하노니

이 아침 살고 싶은 지상에서

눈 뜨고 순금빛으로 죽고 싶어라

 

 


 

 

정성수 시인(서울) / 내가 뜨는 물수제비

 

 

비 내리는 호수 가에서

내가 뜨는 물수제비를 그대가 받았을 때

그대는 내 가슴에

사랑의 징표로

점점점, 말줄임표 하나 찍었습니다

 

물결이 물결에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동안

호수가 제 몸을 열어주어

수심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삶의 의미를 걷어내면서

내가 뜨는 물수제비로 하여금

잠시 흔들렸을 뿐이라며 그대는

그대와 나 사이에

점점점, 마침표를 세 개씩이나 찍어놓고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정성수 시인(서울) / 지구가 해에게

 

 

멈출 수가 없네

그대를 포옹하는 순간까지

 

내 육신이 허공의 파편으로 번쩍이더라도

나는 달린다, 궤도를 이탈할 때까지

 

그대를 향한 46억 년 동안의 짝사랑

처음이자 최후인 절정을 위해

내 그리움의 골짜기마다

싱그러운 꽃향내 준비해 두었다

 

저 깊은 하늘에서

우리의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그것이 그대와의 마지막 이별의 때임을

나는 알지만

 

달려간다, 나는

그리움의 힘 하나로

그대의 이글대는 숨결을 향해

눈부신 폭발의 순간까지……!

 

 


 

 

정성수 시인(서울) / 추억은 우수에 젖은 얼굴로

 

 

이상하지?

추억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얼굴로 나타나지

 

느린 발걸음으로 굽은 어깨로

조금씩 천천히 다가오지

 

마른 낙엽 밟는 소리로

가느다란 바람의 손가락과 함께

기울어가는 노쇠한 햇덩이와 함께

서산에 걸린 무심한 구름 한 자락과 함께

내 앞을 스쳐가지

 

이 세상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그냥 그렇게 머물다가

문득 내 가슴 한 구석을 툭 치고

그 속의 현 한 가닥 슬며시 퉁겨놓고

 

현이 울리는 나직한 추억의 운율에 귀를 기울이며

사라져 가지, 타인처럼

 

추억의 희미한 몇 장면만 살아남아서

색 바랜 깃발처럼 흐느적거리지

 

나는 말없이 서서 그것을 바라보지

 

소리쳐 웃지도 않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지도 않지

 

다만 그 속에

하나의 국외자처럼 우두커니 놓여있을 뿐이지

 

지나간 날의 기억이 흘리는 피 비린내를

한 잔의 소주처럼 들이킬 뿐이지

 

이상하지?

추억은 언제나

우수에 젖은 얼굴로 떠나가지.

 

 


 

정성수 시인

1945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과 수료. 1979 '월간문학' 신인상 등단. 제3회 경기PEN문학대상, 학국시학상, 제1회 PEN문학활동상. 제2회 무궁화문학상 일반부 금상, 김우종문학상 대상. 제9회 이은상문학상 수상 등.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2019.~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