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모습 없이 환한 모습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18.

조정권 시인 / 모습 없이 환한 모습

 

 

  비 오는 밤

  본 적 있니?

 

  가로등 아래서 노숙하는 비

 

  그 맡바닥에 밤은

  더 큰 허공.

 

  허공의 밑.

  시인은 허공을 건축하는 자.

 

  나의 언어는 허공에서는 아직도 망치와 톱일 뿐,

  내 친구 흰 구름이 아직 모이지 않아요.

 

  허공 속을 아직도 떠돕니다.

 

  보헤미아

  들판 여름하늘 흰 구름 모이면 성당 구조물

 

  흰 구름은 성당.

 

  밤이 되면

  내 손은 허공

 

  무늬 없는 벽돌처럼 쌓아올린 거대한 허공은

  세상의 지친 걸인들을 문 앞에서 한없이 걸어오게 하지요.

  벽 속에 숨겨진 통곡하는 방에 숨어

  한없는 울음을 울 수 있는,

  아무리 울어도 밖으로 들리지 않는 저 밤의 하늘 들판이

  내겐 처녀시가 출혈했던 곳일 거 같다는 생각.

 

  촛불을 켜지 않았어요. 촛불을 들고 있는 언어란

  엄마들의 노인네들의 오랜 습관 언어이기에.

 

  시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의 무덤일 뿐.

 

  비 오는 날이면

  우뚝 우뚝 서서 비맞는

  비를 보아라.

 

  비는 혼자 비를 맞는다.

 

  시는 성당 문 앞에서 가설 텐트를 친 빈자들의 무늬라고 생각했어요

 

  내게 시란 무신론 옆에 친 텐트 같은 것.

 

계간 『대산문화』 2015년 가을호 발표

 

 


 

조정권〔1949.2.22 ~ 2017.11,8〕 시인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 졸업.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역임.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