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시인 / 하류
어두운 백척간두 일인실에 누워 신은 우리를 창밖에 매달아 두고 잊어버린 것 같아.
줄을 끊은 새들이 흘러내리는 유리를 닦고 닦다가 손바닥을 떨어뜨리고
주워 온 인형 팔이 스무 개나 있다. 서랍 안에는 낡은 한국어 교본도 있다.
흰 입 검은 입 가르마를 타고 고요히 복화술을 익히고 아름다운 인체를 얻었는데
속눈썹도 셀 수 있을 것 같은 밤인데
이 밤이 신이 꾸는 악몽이라면 우리는 헝겊 옷을 빨아 입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번갈아 등을 내밀고
입김을 호호 불며 서로의 태엽을 감아 준다면 믿을 수 없이 믿음에 가까워져서
사람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이민하 시인 / 키스
붉은 빙산을 떠받치고 마른 성냥을 그어대는 두 개의 분화구 오른쪽엔 바다로 가는 계단, 왼쪽엔 용암에 타는 나무 찢어질 듯 양 날개고 헤엄치는 목 잘린 나비 한 마리
이민하 시인 / 원근법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긴 어둠의 외곽 너머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이민하 시인 / 세상의 모든 비밀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이민하 시인 / 열두 시를 지나는 자화상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당신은 꼭꼭 숨어 해먹 위에서 잠들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안개를 들추고 숨을 죽였네 이마 위의 그림자를 쓸어 올리며 당신은 실눈을 떴네 낡고 빛바랜 청포장이 지평선까지 흘러내렸네 젓가락처럼 식도를 모아 점심을 나누고 나는 햇잎으로 입을 훔치며 오후의 거리로 내려왔네 숨바꼭질하는 연인들의 미로원을 지나 식칼들의 합주 속에 군무를 추는 불빛 지붕들을 돌아 장마철에도 나는 숲길을 올라갔네 빗줄기가 신발에 갈고리를 걸고 예인선처럼 끌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눈꺼풀 위의 빗방울을 개미처럼 튕기며 당신은 잠들었네 해먹 위에 우산을 씌워주고 돌아와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갔네 질주하는 트렁크에 히치하이크한 날도 있네 심장에 낀 살얼음을 긁으면서도 갔네 자면서도 나는 우편낭을 챙겼네 뿌옇고 까만 그을음이 끼는 정오와 자정 자면서도 당신은 편지를 쓰고 있었네 공중에서 녹색 머리칼들이 떨어져 글자들 사이에 섞였네 바람의 잔이 떠다니고 발목만 땅에 묻힌 백골들이 빈속을 채우며 앉아 있었네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왔네 당신은 주섬주섬 자작나무 숲을 수레에 실었네 비켜 앉은 내 손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갔네 밤과 낮이 천천히 뒤집혔네 굴러 떨어진 나무토막을 하나씩 던지며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우다 돌아갔네 아직 뜨거운 잔가지 하나를 뭉개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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