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율 시인 / 꼭짓점 자리
물끄러미, 나의 맨 처음과 끝이 만나 소멸해 가는 배꼽을 들여다본다
언어 이전의 물소리 발음과 함께 첫 울음 ㅇ이 소용돌이쳤네
ㅇ이 아문 구멍을 씻는다
살다가 눈물에 찔려 엄마, 불러 볼 때 내가 아픈 나의 중심에 가장 아름다운 통점이 맺혀 있다
ㅡ계간 《시인시대》 2021년 봄호
김민율 시인 / 비커의 샤머니즘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 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김민율 시인 / 고깔모자 기념일
머리에 쓴 생일파티 고깔모자는 기억 속, 크리스마스트리이다
큰 화분에 심은 어린 소나무 반짝이고 있다 포만을 모르는 아이들은 가난에 꼬마 전구를 켠다 모두 감은 눈에 적은 소원을 시선으로 매달아 놓는다 기적은 내일 아침 완성될 거라 믿는 아이가 꼭대기에 별빛을 걸어 놓는다
작은 은종 소리처럼 모여드는 웃음소리들
구멍난 내복 속으로 바람 몇 개가 드나드는지 세는 아이가 천국의 소재지를 묻는 기억을 버린다
불 꺼지고, 실루엣에 숨은 크리스마스트리, 종소리가 어둠의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헤매는 까치발을 화분에 옮겨 심으면 제 이름이 적힌 초대장에 손끝이 닿을 것 같다.
김민율 시인 / 도장에 채록된 소녀사(少女史)
달무리가 초경에 도착하자 떠나가는 몇몇 아이들 그중에는 이제 막 도장 안으로 편입되는 이름도 있다
아버지는 회양목을 사포에 문질러 초경흔 만한 달빛을 채취하고 둥근 테두리를 친다 시점 0이 흐른다. 멈춘다 달빛의 수평을 잡고 달빛을 잘라 이름을 새긴다 마침내 음력의 관습에 따르는 이름이 바깥을 상상한다
울타리 안에서 월면의 얼룩이 돌올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부르던 각설이 타령은 달무리 바깥으로 사라지고 오곡찰밥을 얻으러 다니던 걸음들 도장 글씨 같은 골목에 갇혀 있다
기억을 후 불면, 회상록에 기록된 신작로가 열리고 계절이 외투를 벗으며 마을 바깥을 기웃거리고 있다.
오리 부리처럼 봉숭아꽃을 물들인 스무 살 손톱이 호주머니 속 지문을 문지르며 신작로 밖으로 사라진다
외곽이 무너진 도장이 이름을 놓치고 있다
입김을 불어 떠나간 이름을 불러 보면 외곽부터 지워지는 메아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손끝에 입김을 부는 풍습은 망각이 관습인 마을의 주문이다.
김민율 시인 / 똥에서 별까지
널빤지 두 개를 가로질러 놓은 변소에서 혼자 똥 눌 수 있을 때 까지는 엉덩이와 마당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아버지가 내가 눈 똥을 한 삽 떠서 돼지에게 던져 준다
내가 유성을 바라보며 자라나는 속도로 꿀꿀거리는 소리가 끙끙대며 몸을 잊어가고 있다
똥에서 별까지는 얼마나 먼 간격인가
마을 사람들이 먹을 땄다 정점에서 해체되는 자모음 몇 근을 내 손에 들려주어 푸대에서 샌 핏물에 무명옷이 물들고
멱 따는 소리가 몇 해째 귓속에 갇혀 있다 햇빛은 몇 시에 소녀 몸에서 출발하는가
소녀들이 "음陰"자를 처음으로 받아 쓴 몸에서 한가운데로 오므리는 습관이 생겨나고 있다 모음 "-"가 초성 "o"과 종성 "ㅁ"을 맞추면 동의하는 "음"에서는 순결이 신음하는 "음"에서는 어금니의 압력이 생겨난다
석쇠에서 삼겹살이 분해되고 있다 돼지의 사정 때처럼 어근을 비틀고 있다 "음"이 "꿀"로 지글거리는 동안 돼지라는 별자리는 몇 광년을 달리면 도착하는 간이역인가
돼지가 내 엉덩이를 받들며 올려다보고 있다 아버지가 변소 밖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판자문 문고리를 쥐고 문짝 틈새를 살피는 습관을 만든다
김민율 시인 / 그럼에도, 위대한 배양 접시
1
강낭콩의 첫 걸음; 붉은 색이 돋아나지 않아 대화할 수 없는 이목구비에 네 기억을 심는다. 너의 모습은 첫 대면 얼굴에서부터 통증으로 자라난 것 곪아터진 뒷모습에 몇 평의 그늘이 켜져 있다.
배양 접시를 볕드는 창가로 다시 옮겨 놓는다
뒷모습을 배경으로 한 앞모습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꽃받침이 생략된 얼굴에서 표정 몇 송이가 시든다
앞모습을 더 두근거리면 웃는 떡잎을 미완성 표정이라 결론지을 수 있을까
2
감정이 붉은 빛을 오독해 얼굴이 깨어졌다 울음소리로 접착해도 붙지 않아 표정에서 침묵이 튕겨나간다
입이 생겨, 눈이 두 개씩이나 생겨, 웃는 표정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3 실험실 구석에서 채 걸어 보지도 못한 첫 걸음이 시든다
이목구비가 흩어져 서로 다투고 있다 또 다른 내가 옳다고 믿는 나로 군림한다 나는 또 다른 나에게 복종한다
이목구비를 쓸어 담아 온전한 얼굴로 만들 수 없다.
김민율 시인 / 아무것도 발아시키지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자기를 한 웅큼 쥔 씨앗들은 모두 몸 어디쯤에 파종되었을까
종묘상 앞에서는 호주머니가 먼저 굶주린다 몸은 모종이 되려고 양지와 음지를 왕복하며 서성거린다 손가락을 오그려 쥔 사람들은 발아할까
몇 개의 가지로 갈라진 간절한 말을 입 속에 파종했다
첫 자음을 발음하는 게 어려웠다 두려움이 쌍떡잎을 발음하는 순간을 주저해서, 종결어미를 못 갖춘 단어가 생겨났다.
사랑을 동어 반복 형식으로 고백하는 혀가 자꾸만 헐었다 어순을 잃고 뒷말들이 모두 헛끝에서 고사했다
모종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꽃받침과 만날 수밖에 없는 자음을 기다렸다 꿈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열병이 지속되었다
이파리보다 먼저, 무작정 꽃을 발화하는 목련의 안쪽에서 오래도록 맺힌 가뭄이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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