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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시인 / 늙은 악공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과 귀 감각이 무뎌져 악기를 내려놓네.
악기와 한 몸이 되는 날은 쑤시던 몸도 거뜬하고 뭐 부러울 것이 없어 소리에 맞춰 파닥이는 어성초도 잠깐 울음을 멈춰주던 벌레도 고마웠네.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어느 곳이나 내 고향 같았고 내 눈은 빛났고 잠들면 내 먼 곳으로 흘러갔던 음악이 내게 다시 돌아오기도 했네.
악기를 내려놓으니 달력에 빽빽하게 채우던 일정이 사라지고 달력은 끝물이 온 들판 같아 죽정이가 있고 검불이 있고 밤새 어둠을 갉아대는 생쥐가 바스락거리고 날개 죽지 다친 철새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꺽꺽 울고 있는 것 같아, 악기를 내려놓은 것이 세상을 내려놓은 것 같아
악기를 놓고 다시 들추어 보는 슬픔도 진화한다, 말 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관하여,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그리운 파란만장 아담이 온다. 도대체 이 안개들이란 시가 시어도 내 마음을 악기로 탄주해 낸 것이나 악기를 놓으니 내게서 멀어지는 시라
악기를 놓으니 뒤란에 창호지에 들이차는 싸락눈소리도 바람이 악공으로 바람이 만든 음악인 것을, 저 물소리도 물이 악공이라는 것을 나만 악기를 가진 것이라 기고만장했으니
내가 악기를 놓으니 비로소 물총새도 악공이라는 것을,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도, 먼 우레도 악공인 하늘이 만든 음악이라는 것을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의 감각이 무뎌져 악기를 내려놓으니 방울벌레 북방여치도 뛰어서 땅을 울리는 산토끼도 온몸으로 땅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악공이라는 것을 아네.
세상은 작든 크든 관계없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악공이 되어 만든 음악으로 틈이 메워지고 단단하게 이빨이 맞아 들어가고 한 땀 한 땀 수놓는 씨줄과 날줄이 된 음악으로 어둠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을
한 때 내가 악공이었을 때 내 음악을 들으려고 멀리서 나와 주파수를 맞추려 지지직거리는 채널을 오래 돌린 사람을 알고도 있네.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의 감각이 무뎌져 악기를 내려놓으니 나 비로소 악공의 나라에 와 있다는 것을 아네. 음악의 나라에 와 있음을 아네. 내가 필사적으로 악기에 매달렸다는 것은 나만을 고집했다는 것을 알았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라며 음악에 죽고 음악에 살고 하는 내 굳은 의지는 총탄의 소리나 포성의 소리를 만드는 것과 같았음을 내가 악기를 들고 보낸 푸른 밤이었다는 것은 자아도취의 날이었다는 것을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의 감각이 무뎌져 소국 앞에 악기를 내려놓네. 내 음악이 누군가의 가슴에는 들꽃이고 강물이고 봄날이었으나
악기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아우라지, 아우라지 물소리도 듣고 은하수 출렁이는 소리 아이가 어머니 젖을 빨다 스르르 잠드는 소리 듣네. 옛날의 악공이 달 푸른 언덕에 올라 달빛과 세상과 어우러지던 시절 생각나네.
이제는 악기를 내려놓았으니 마음을 뜯고 탄주해 시라는 음악을 만들려하네. 자꾸 내게서 멀어지는 시를 잡아두는 것이 상책이라, 꽃그늘을 파고드는 꽃 짐승처럼 시를 파고드는 어린 시 짐승이 되어
늙은 악공,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의 감각이 무뎌져 악기를 내려놓네. 악기를 내려놓으며 내가 받드는 해저에서 발굴해 내는 유물에 달라붙은 해초처럼 어둠이 너덜거리는 내 마음이여, 이제 어떻게 시를 연주해 낼 것인가.
시가 음악이라는 말, 자주 내가 썼다가 지웠던 말이라는 것을
나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의 감각이 무뎌져 악기를 내려놓으므로 허전한 빈손 백석의 시집을 들었다가 다시 시의 나라로 홀로 찾아가려는 별 푸른 밤이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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