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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현미 시인 / 거미엄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3.

강현미 시인 / 거미엄마

 

 

거미를 제목으로 시를 쓰려는데

칠순 연세에 아직도 잡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엄마가 거미줄 옷을 입고 있었다

가만 보니 팔다리는 가늘고

배가 나온 엄마는 거미를 닮아 있었다

 

시집살이 사십 년에

괴팍한 아버지 평생 잔소리 수발

자식들 출가시키면 편하게 살까 싶었는데

재혼한 딸은 아이를 맡기고

딸 하나는 시집가라는 성화에도

아직도 등에 매달려 산다

지나친 배려에 식구들의 지청구를 들어도 그 때뿐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수십 년 수발의 힘겨움이 골수에 미쳤나

파킨슨병으로 허리는 굽고 손은 떨리는데

아침이면 부지런히 밥을 짓는다

 

시는 잠시 접어두고

잠든 엄마 손 잡고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이젠 등에 진 짐 다 내려놓고

같이 나이 들어가는 딸을 친구삼아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볍게 사시라고

 

 


 

 

강현미 시인 / 먹다

 

 

용케 면접까지 가서 떨어진 취직자리

이번에도 회삿밥은 못 먹고

라면에 찬밥을 말아 꾸역꾸역 먹는다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쓰레기통은 쓰다만 자기소개서를 구겨 먹고

지원한 회사는 먹을 게 없는가

아흔두 번째 내 이력서를 말아 먹었다

 

슬쩍 엄마를 쳐다보며 먹는 밥은 눈치도 함께 먹는데

눈칫밥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허기만 먹는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냐 잔소리를 먹고

확 시집이나 갈까 마음 먹다가

대기업 다니는 친구 전화를 씹는다

 

어렵게 얻은 편의점 알바 자리는 며칠 만에 잘리고

용돈 주는 엄마 앞에서 주눅을 먹는다

시간은 가는데 해 놓은 것도 없이

홀랑 나이만 먹고 나잇살만 더 먹는다

 

토익 점수라도 올려야겠다고 공부하는 밤,

얼굴은 찬물을 먹고

어딘가에는 내 자리가 있겠지 마음을 고쳐먹는다

 

 


 

 

강현미 시인 / 울음소리

 

 

아파트 쓰레기장 구석, 새끼 고양이가 운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고 멀어지면 울고

어미는 새끼를 잊었는지 목이 쉬도록 운다

 

고단한 서울살이에 일을 마치면 죽은 듯 잠이 들었고

오랫동안 꿈도 꾸지 않았는데

그날 밤, 고양이 울음이 내 꿈속으로 따라왔다

비린내가 묻어있는 고양이 소리는

차츰 바람 같은 울음으로 바뀌어 가고

잠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옛집이 보였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고

등을 내준 마루는 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새끼를 잊은 어미 고양이처럼 고향을 잊고 있었다

이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 전에는 찾지 않으리라

등 돌린 고향

 

십 오년 만에 고향 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낡은 마루가 먼저 마중 나왔다

윤기 하나 없는 마루는

삭은 틈새로 바람이 드나들며 울고 있었다

 

 


 

 

강현미 시인 / 눈사람

 

 

하얀 눈밭 위에 우뚝 서 있는 눈사람

한 무리의 아이들이 왁자한 웃음을 깨물고 몰려온다

눈싸움을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눈사람은 싸움에 끼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무거워서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고 한 쌍의 연인이 눈사람을 찾아온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두 사람은

“눈사람이 춥겠네”

따뜻하게 목도리를 둘러준다

눈사람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꿈적도 하지 않았다

너무 추워서라고 생각했다

 

하늘에 별이 뜨면 작은 새가 찾아와 머리에 쉬어갔다

눈사람은 보드라운 털을 만져보려 했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 이었다

 

햇살이 따뜻해진 어느 날 눈사람은 이상한 걸 느꼈다

온몸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흐르는 것은 땀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것을

 

 


 

 

강현미 시인 / 안경집

 

 

집이 있다는 건 내 편이 생긴 것 같아 참 든든한 일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안경을 찾는 남자

안경은 오늘도 그와 동행이다

그가 데려간 곳은 아파트 모델 하우스

안경은 콧잔등에 살포시 앉아 남자의 행동을 관찰한다

 

바쁘게 고객을 안내하고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고

알량한 실적을 보고하고

질책하는 상사의 꾸중에 안경이 먼저 무안해 흘러내린다

 

피곤에 절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눈을 비빌 때

안경은 해방감대신 측은한 마음이 밀려왔다

남자는 우리 가족은 왜 집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남의 편을 위해 다시 분주히 움직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불야성을 이루는 아파트 단지

서울 시내에 집 한 채 마련하는 것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구입하는 일은

맨 손으로 성(城)을 쌓는 일

남자는 절반뿐인 집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고

안경은 그래도 나는 집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눈으로 걸어 다닌 안경

안경집으로 들어간다

어깨가 축 처진 가장처럼

 

 


 

강현미 시인

서울 출생, 계간 《시현실 》 2017년 봄호 신인상 수상하며 등단. 동안문학회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한국예술인 복지재단 창작준비금 지원 수혜. 시집 『거미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