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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용주 시인 / 인디언의 女子 4.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4.

정용주 시인 / 인디언의 女子 4.

 

 

숲에 나무들 흔들리는 소리 몰아 바람이 갑니다

풀들이 쓰러집니다

남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가벼워집니다

바위의 얼굴을 만지며 계곡을 쓸고 가는

바람 속에 당신이 있습니다

겨울나무 같은 내 육신을

당신이 흔들고 지나갑니다

더 먼 곳으로 가라고 더 먼 모래의 고향으로

당신 영혼을 몰고 가라고

나를 흔들고 지나갑니다

뿌리 둔 것들은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산정 높이 솟은 까마귀 날개를 타고

검은 구름 속으로 당신은

겨울나무 같은 나를 흔들고 지나갑니다.

 

 


 

 

정용주 시인 / 입

 

 

호수가 한입 가득 하늘을 물었다

바람이 지나간다

구름이 지나간다

얼마나 큰 거인의 입인가

고기들이 살고

물풀이 뿌리 내린다

입을 다물 수 없다

 

 


 

 

정용주 시인 / 봄비

 

 

숲에 봄비 내린다. 봄비는 아주 조용한 걸음으로 와서 자기가 방문하는 사물의 귀를 나직이 위로해준다. 봄비가 건드리는 사물의 소리는 진동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든다. 하늘의 부드러운 속삭임들을 모아 마른 가지들은 초롱 같은 물방울을 매단다. 갈대는 말려있는 잎사귀로 물방울을 받아 들떠 있는 제 몸의 소리를 재운다. 바람을 건너온 시간을 다독이는 마른 풀들. 늙은 밤나무의 거친 껍질 사이로 스며드는 물기. 덩굴식물의 허공 길이 젖는다. 골짜기를 채우며 능선을 감아 오르는 산안개는 운해의 허공으로 삼각 배를 띄운다. 보슬보슬 풀어지는 흙의 입술은 바닥에 엎드린 여린 싹들의 볼에 연초록 핏줄을 닦아준다. 가지를 옮기며 이슬을 털어내는 후투티 솔새 박새 콩새의 몸이 젖는다. 툇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듣는다. 봄비의 나직한 소리는 참빗처럼 빗겨지는 결 고운 슬픔이 있다. 숲에 봄비가 내린다. 이빨이 간지러운 강아지가 물어다 놓은 운동화 한 짝이 풀밭에 뒤집혀 젖는다.

 

 


 

정용주 시인

1962년 경기도 여주 출생. 2005년 계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인디언의 女』,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와  산문집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고고춤이나 춥시다』,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가 있음. 2003년부터 치악산 금대계곡의 흙집에서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