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정애 시인(고령) / 느린 우체통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4.

이정애 시인(고령) / 느린 우체통

 

 

들판의 연주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다림에 목마른 우체통

작은 떨림조차 놓치지 않고

다가오는 발소리에 반색을 한다

 

꽃잎이 날리고

억새가 휘청 일 때도

우체통은 그 자리에 있었다

꼭 다문 입술 사이

바람의 말이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공복

새들이 흘린 말을 쪼아 먹는다

 

투명펜으로 편지를 쓴다

무색이라 지우기 쉽고

문맥이 틀려도 고칠 필요도 없다

턱짓으로 마침표를 찍고

체념 몇 구절 추신으로 남긴다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여

일방통행은 갈증을 호소하고

반응 없는 음악은 지루하다

자극에 민감한 답장은

꼬깃하게 접혀 있고

 

난독을 읽던 우체통

마비 된 시간이 섞인다

과거가 될 미래의 어느 날에

겅중거리며 만나게 될 대답

 

스크린 한 컷을 온전한 영화라고 우긴 민낯

엉켜 버린 순간의 낯설음을 안고

가을 한 모퉁이 느림과 인연을 맺는다

 

 


 

 

이정애 시인(고령) / 아버지의 지게

 

 

아버지가 똥장군을 지고 밭으로 가신다

똥냄새를 몰고 가신다

지게 작대기로 길섶의 풀을 툭툭 치며 가신다

 

노을 진 하늘에 어둠이 밀려오면

늙은 호박 한 덩이 얹어 오신다

메뚜기 여치 울음도 데려 오신다

 

똥통을 내려놓은 빈 지게

딸을 태우고 마당 한 바퀴 도신다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간다

 

찬물에 밥 말아

풋고추 된장에 푹 찍어 먹고

또 밭에 나가신다

 

지게가 아버지를 지고 가신다

 

 


 

 

이정애 시인(고령) / 감꼭지

 

 

나뭇가지사이 여백이 꽉 찼다

 

가지 끝 자궁은 텅 비어

빈 꼭지만 대롱거린다

농익은 가을이

온몸으로 바닥에 혈서를 썼지만

누구도 읽지 않고 지나친다

 

애초에 감과 꼭지는 한 몸이었다

감꽃이 노랗게 피어 소쩍새를 불렀지만

어미는 은밀하게 꽃을 솎아내고

 

꽃 진 자리 봉긋 푸르게 솟을 때도

어미는 냉정했다

튼실한 놈만 남기고

어설픈 놈은 버리기로 작정했다

바람을 핑계 삼아 슬쩍슬쩍

마음을 내려놓았다

 

가을볕이 마지막 정성을 쏟고

속살이 주황으로 물이 들면

그제야 어미는 집착을 내려놓는다

 

꼭지는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

빈집에 바람만 들락거린다

 

 


 

 

이정애 시인(고령) / 가로등

 

 

줄지어 선 가로등

땅거미가 지면

졸음을 떨치고 눈에 불을 켠다

 

외발로 바닥을 굽어보며

무장 해제된 빛 부스러기

집요한 어둠을 밀어낸다

희미한 빛은 하루살이처럼 파들거리고

그늘에 잘려나간 빛의 조각들

살점은 떨어져나가 겉가죽만 남아 너울거리고

꺾이지 않으려고 허리를 바짝 세우고

평생 한자리에 붙박여 산다

 

야간 근로로 뒤틀린 어깨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시간

어둠과 팽팽하게 대치중이다

점점 쌓여가는 어둠의 농도

가로등 사이 안개가 피어오른다

 

천년을 하루같이 긴 다리로 서서

깊은 숙면을 취하지도 못하고

수호신처럼 늙어간다

 

깡말라가던 가로등

속이 텅 비었다

어둠의 분비물은 환하다

 

 


 

 

이정애 시인(고령) / 눈썹을 그리다

 

 

가느다란 대궁이 울음을 꽃피웠다

소리를 없앤 투명한 물기

붉은 이슬에 뒹굴며

혼곤히 몸을 적시고

햇살의 낚시에도 쉬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슬픔의 원료는 피

씁쓸 짭짤하다

 

피를 탕진하고도 농도가 묽어지지 않기 위해 경계를 설정하고 나약한 선에 뼈대를 세운다 넘치고도 모자란 눈물 잔잔한 파문이 번져 성분이 다른 얼굴을 내민다 눈이 키운 바늘 하나, 수시로 상처를 찔러 설움이 쏟아진다 눈물은 각오를 다지기에 좋은 재료 넘어지면 받쳐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다시 일어난다

 

가늘고 반경이 짧은 눈썹은 비경의 호수를 온전히 감싸주지 못하지만 북풍과 서리를 막아 준다 오늘도 안개에 주파수를 맞추고 감정을 다스린다

 

눈물이 차오를 때 조금씩 자라는 눈썹

처방전에 없는 상비약이 되었다

 

 


 

 

이정애 시인(고령) / 궤도를 설정하다

 

 

달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계산하여

눈에 잘 띄는 길목에 자리를 잡았다

동그란 눈을 뜨고 방긋 웃기도 하고

바바리 깃을 세워

근사한 몸 슬쩍 가리기도 하고

화창한 날 언저리를 배회하며

휘파람을 쏟아내기도 한다

 

사계절의 달콤한 게임은 언제나 설레게 하고

색색 다른 옷을 갈아입는 모습에

편서풍과 해류을 슬쩍 끼워

불장난을 치기도 한다

일정한 규칙이 없어 늘 깨어 긴장한다

 

변화는 새로움을 탐닉하고

어디라도 바뀔 수 있는 체널은 자유롭다

집착만으로 허기를 채울 수 없듯

허기진 갈증에 간절한 날개를 편다

 

하지만 더 이상 가까이 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궤도

누대의 연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넝쿨손을 뻗어 다가갈 수는 없지만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존재감

 

이슬 젖은 지구가 부스스 깨어나는 아침

밤새 지친 노동에도 달은 설렌다

명도와 채도를 달리해도

태양을 따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바늘로 꿸 수 없는 사랑도

예비하신 그 분

거리 유지가 한결같은 대답이다

 

 


 

이정애 시인(고령)

경북 고령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시집 <길 위의 섬>. 광명문인협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