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시하 시인 / 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6.

이시하 시인 / 나무

 

 

나무의 살을 물어뜯었다 질기고 텁텁하고 아릿했다 나무는 조용히 햇살을 당겨 제 몸에 감았다 나무가 울지 않았으므로 나도 울지 않았다 나는 우는 나무가 보고 싶었고 우는 나무 때문에 아프고 싶었고 아파서 울고 싶었다

 

햇살을 칭칭 동여맨 나무의 상처는 따스했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병아리 발자국 같은 개나리꽃처럼, 개나리꽃 피는 봄날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따스했다

 

햇살을 온몸에 바른 나무는 하나님처럼 빛나더니 상처에서 연초록 새싹이 돋아났다 내 잇몸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빨을 뚫고 나무들이 자라났다 상처에서 자라난 새싹들이 입안으로 날아들자 나무들이 뽑혔다 이빨도 함께 뽑혀나갔으므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내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한없이 울었고 나무는 끝없이 웃었다

 

춥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니 햇살이 온데간데없다

 

나무는 이제 웃지 않았고 나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나무가 내 등에 기대어 졸기에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살다보면 밤새 나무를 재워야하는, 이런 별스런 날도 있는 것이다.

 

 


 

 

이시하 시인 / 소란한 집

 

 

너무 많은 엄마, 너무 많은 아버지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아침이면 수많은 엄마가 와르륵 쏟아져요

비워진 밥그릇 안으로, 캄캄한 입들 속으로

구멍 난 양말 속으로, 부스스한 머리칼 속으로

누릿누릿 뜬 얼굴 속으로, 매케한 콧구멍 속으로

푸념푸념푸념푸념 거품을 물고 쏟아져요

 

어느땐가 교실 문까지 따라온 엄마를

신발짝 흙 털듯 타악! 떨어내기도 했죠

어깨에도 붙었다가 가방에도 숨었다가

뭉툭한 연필심에 침처럼 묻어있기도 해서

아, 지겹고 지겨워요

그런 날 해는 왜 더디 지는지 몰라

너무 많은 엄마가 저녁밥 지으러 갈 때쯤,

 

너무 많은 아버지가 구멍가게 평상에서 흘러나오죠

술병에서 흘러나오고, 가게 주인 욕설에서 흘러나오고

밀린 외상값에서 흘러나오고, 빈 주머니에서 흘러나오고

어허, 달아놓으라니까! 움켜쥔 멱살에서 흘러나오고

제기럴제기럴제기럴, 혀가 꼬인 채 쏟아지죠

아, 징글징글도 해요

 

니 애비 쏟아지기 전에 어여 밥 먹어라

그려? 어디 먹어봐라, 콰르릉, 콰릉!

엎어지는 밥상, 캄캄한 입들, 우는 입들, 빈 입들

쫓겨나는 입들, 닫혀진 입들, 막막한 입들

앙바틈한 사이로 우릉우릉 쏟아지는

너무 많은 아버지, 주워담으려 몰려드는

우우, 너무 많은 엄마!

 

빈집이 퀘엥퀘엥 울리고

빈 쌀독이 우웅우웅 울리는 저 집,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고래고래 들려오는 저 집,

소란한 저, 저!

 

 


 

 

이시하 시인 / 자전거를 타세요

 

 

가난한 아부지, 눈속엔 꿈이 없어요 막막하고 조용한 방죽 속, 병든 붕어 같은 당신이 애틋하여 결핵 걸린 조그만 딸은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방직공장엘 나가요 폐병쟁이란 걸 들키지 않으려 기침도 마음 놓고 못하는데, 기침이 시작되면 재빨리 사람들 틈을 벗어나야 하는데, 배에 힘을 주고 숨을 멈춘 채 기침이 잦아들길 기다려야 하는데, 아버지, 당신은 오늘도 술이 술술 넘어가 좋다셔요

 

월급을 탔어요, 아버지 나팔꽃같이 환해져선 잠시 웃었어요 나팔꽃은 참 빨리 시들어요,그치요? 시든 꽃처럼 다소곳이 월급봉투를 비웠어요 짐 자전거 한 대와 검정 장화 한 켤레 사서 보냈는데요 아부지, 달려나와 받으세요 이장님 것보다 좋은 그것을요 어서요, 아부지!

 

자전거를 타고, 검정 장화를 신고, 논으로, 밭으로, 햇살 속으로 사라지세요, 사라져 주세요!

노을을 지고 오세요, 아부지.

 

 


 

 

이시하 시인 / 낯익은 밥 냄새

 

 

저노무 동백,

내년엔 파버려야 쓰긋다

 

둥근 뼈가 마늘 쪼개다 하는 푸념

동백이 엿듣고는 파르르 떤다

내 몸에 오소소 소름 돋는 소리

살갗들이 귀 쫑긋 세우는 소리

어무니, 버릴 거면 저 주세요

오이야, 후딱 가져가그라

내 몸 하나 지탱허기두 구찬은데

성성한 저것을 우예 돌보누

어여 파가라, 하신다

 

당신 가신 후

혼자 남을 동백이 노상 근심인 게다

잘 살까 싶은 게 애물단지인 게다

흙까정 퍼가라, 낯선 곳서 살려믄

지 먹던 밥 냄새라도 맡아야지

 

나무에게도 고향이란 게 있을까

나고 자란 곳의 바람, 하늘, 햇빛, 눈, 비 같은 것들을

나이테 사이사이에 끼워두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때로 저 먹던 밥 냄새 그리워

시름시름 말라가기도 하는 걸까

 

마늘을 다 쪼개신 어머니, 휘둘휘둘 나가신다

나는야 죽을 때까정 여그, 내 밥덩이 먹구 살란다,

하시며,

 

 


 

 

이시하 시인 / 저녁 무렵

 

 

여린 목소리가 엄마라고 불러줄 때

명치끝서 짠한 아픔 같은 게

눈물 같은 게

비어있던 가슴 안으로 먹먹하게 차오르고,

왜 그래, 울먹울먹하는 아이의 어깨에

흐린 안개 같은 것이 피고

안개는 또 내 눈에서도 피고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애틋해

모질던 마음 헤프게 벌어지던

저녁 무렵,

 

눈치 없는 달맞이꽃 가두었던 달빛을 환하게 터트리고

토닥토닥, 흔들리는 어깨를 그러모아 두 팔로 단단히 묶고

 

엄마 여기있어, 어디 안가

뭉글뭉글한 게 눈 안에 가득해져서

끔벅이지 않아도 왁왁 쏟아지고,

울어?

아니야

눈에서 물 나오잖아

안개야, 안개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거야

참 신기하다

그래, 참 신기하지?

여린 목소리가 금방 환해지고

흔들리던 어깨도 가만히 따스해지고

달맞이꽃 저 혼자 그만 무안해져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아련한

저녁 무렵,

 

 


 

 

이시하 시인 / 홍등을 읽다

 

 

당신은 헐값에 나를 읽어요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요

침을 바른 당신의 손, 끈끈하고 질척한 당신의 손,

혀 같은 당신의 손이 나를 읽을 때면

내가 꽃인 게, 늘 꺾여야 하는

꽃 같은 여자인 게 싫어져요

당신은 나를 포르노로 읽어요

삼류 비디오 테잎 보듯 해요

하이틴 로맨스 정도라면 눈 딱 감고 읽혀줄 텐데요

당신의 충혈된 눈이 무서워요

눅눅한 집,

곰팡이 핀 벽,

바퀴벌레 우굴 대는 싱크대 서랍,

당신이 나를 읽을 때면 왜 그런 것들이 떠오르죠?

스멀거리는 그림자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요

감탄도, 클라이맥스도 아니라구요

당신이 나를 포르노로 읽는 동안

나는 음습한 괴기 소설을 상상해요

소리를 지르죠

진저리나는 일상에 대해,

불결한 밤꽃 향기에 대해,

남아프리카의 어린 꽃들에 대해,

에이즈에 대해,

 

오늘도 당신의 붉은 혀는

헐값으로 산 어린 꽃을 읽어요

죽음을 볼록하게 안은 알 밴 꽃들이

웃는 듯, 입을 벌리고 있어요

물, 물, 무울,

 

당신은 언제나 불, 불, 부울로 읽는군요.

 

 


 

이시하(李翅河) 시인

1967년 경기도 연천에서 출생. 본명은 이향미. 2006년  제1회  《시인광장》 시문학상에 〈나무〉外 5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6년 제12회 지용 신인문학상 당선. 2008년 제10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으로 『푸른 생으로의 집착』이 있음. 2009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시부문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