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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서 시인 / 슬픈 유작遺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7.

이현서 시인 / 슬픈 유작遺作

 

 

채송화 붉은 잎이 몸을 닫습니다

 

후두둑

여름이 제풀에 쓰러져 갑니다

 

숨 막히던 입술만 둥둥 허공에 매단 채

뜨겁던 말매미의 울음도 순간에 뚝 그쳤습니다

 

누가 그 뜨거움을 가져갔을까요

 

끝없이,

시위를 당기던 화살도 치욕과 굴욕 사이를 서성거리다

어제와 과녁을 놓쳐버렸습니다

 

뼛속까지 각인된 어둠이 드러날까 봐

둥글게 몸을 말았던 꼬리 칸의 사람들* 꽃을 놓치듯

핏빛 목숨이 팔랑, 나비처럼 사라져갑니다

 

겨드랑이 사이로

검은 먹구름의 냄새를 맡으며

소실점을 향해 추락하다

벼랑을 키우던 아득함과 허기의 나날

 

퍼덕거리는 심장에서 가까스로 돋은 날개

한 번도 펴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모으던

남은 빛 하나마저 시린 모퉁이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가을이 오기 전

숭숭 구멍 난 잎새들이 입술이 봉인 된 채

검은 화폭을 통과합니다

 

애도의 형식마저 생략된 채

허공을 움켜쥔 바람만 때늦은 조문을 하고 있습니다

 

*<설국열차>의 맨 마지막 칸,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비유.

 

 


 

 

이현서 시인 / 사랑과 우정

 

 

봄의 생동들로

저만치 산들이

싱그럽게 실록으로 가득 차오르고

 

낮게 깔리운 구름 한 점도

여명의 기지개를 펴며

 

햇볕 쪼운 아침 이슬!

고요하리 만치 여유를 즐겨 봅니다

 

초롱 초롱 파란

잔디마저 하늘이 스며있는

흐뭇한 미소로 빼곡히 영글어 가는

아침 하늘 !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

들 자리

날 자리 발자국에 소리 내며

또 각 또 각 다가선 당신의 향취

 

생각,느낌,관념들까지

우정과 사랑 둘 사이에 징검다리 하나둘

못다 한 연민의 사랑

우정 같은 사랑의 풀 피리 소리

 

갸웃 등 대는

조그마한 머리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길래 불이 날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두통들

이 생의 한심스러운 운명같은

시간이 지나가는 아픈 여훈들의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흔적마다의  발 자욱 소리

또 각 또 각

나의 가슴 안에 스민 여훈들에 게

오늘도

나는 창밖을 서성이면서

 

아픈 가슴 앓이

 

정녕 당신이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당신이 내게 오는

매 순간들마다

맞이하는 나날들에게

서성일뿐!

 

연민하는 사랑. 우정

그것 초자도 아픔이었다고

사랑했었다고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여민

가슴 안에 아픈 눈빛도.

메마른 입술도. 주름 하나 내 안에 있는

슬픈 연민

허헛한 가슴알이

사랑은 주는 것 고통은 받는 것

 

어느 사이 운명처럼

나에게 이런 사랑이라는 단어조차도

내게 버거움을 웅켜잡으려는 순간들마다

주어진 시간 동안 모든 것은 내가 나에게 주는

신호임을...

까닭임을...

나는 압니다

 

 


 

 

이현서 시인 / 재의 날들

- 인간 화석

 

 

웅크린 그의 어깨 너머 잿빛 시간이 휘어진다

절망이 범람하던 골짜기마다 사무치는 그림자가 깊다

죽음의 의식마저 생략된 채 화석이 되어버린 그의 전생이

수십 세기를 건너고 있다

겹겹 어듬으로 쌓인 지층 속 날선 각의 끝을 잡고

긴 침묵으로 흐르는 저 슬픔의 무게를 난 알지 못한다

 

귓바퀴를 흔드는 술렁임의 난청 속에서

속수무책 죽음의 포자들이 부풀어 오를 때에도

왁자한 꿈의 빛깔이 피던 골목에서

고백처럼 푸른 주문을 외웠을까

아득한 미로의 밀월을 꿈꾸었을까

 

필생의 몸부림으로 바싹해진 수직의 난간마다

불의 심장 속으로 사라진 말발굽 소리

죽은 계절을 건너오는 동안

재의 울음을 딛고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

누군가의 목숨인 듯, 눈감지 못한 사랑인 듯

 

《시인동네》 2017. 12월호

 

 


 

 

이현서 시인 / 물의 집

 

 

하늘 한자락 끌어들인 행성에

시린 달이 뜬다.

사막을 횡단하던 그녀

지친 숨결을 내려놓으면

자분자분 생채기 난 둥근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불의 입자들

재빛 시간의 부리에 닿는다

외로움의 눈금만큼 높아지는 수위

찰랑찰랑 목덜미까지 기어오르고

대숲에서 자란 키 큰 바람이 눈치를 살피며 기웃거린다

마디마디 푸른 울음을 쟁여둔 관절마다

다스한 온기가 잠시 쉬어 갈 무렵

부력을 얻은 달은 구름 속을 떠나고

삐걱이는 파열음은 귀가를 늦춘다

금간 마음결을 입질하던 기다림의 배후엔

방류되지 못한 슬픔이

목백일홍 꽃잎으로 지고 있다

 

2010년 겨울호 7시로 여는 세상 』에서

 

 


 

이현서 시인

경북 청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육학과 졸업. 2009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구름무늬 경첩을 열다』가 있음. 제4회 박종화문학상 수상. 현재 『미네르바』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