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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준관 시인 / 구부러진 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7.

이준관 시인 /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시인 / 가을 떡갈나무숲

 

 

떡갈나무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 한데,

텃새만 남아

산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는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 거야, 잎을 떨군다

 

 


 

 

이준관 시인 / 부엌의 불빛

 

 

   부엌의 불빛은

   어머니의 무릎처럼 따뜻하다

   저녁은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고양이는 다정히 핥는다

   수돗물을 틀면

   쏴아 불빛이 쏟아진다

   부엌의 불빛 아래 엎드려

   아이는 오늘의 숙제를 끝내고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이 등유가 되어

   부엌의 불빛을 꺼지지 않게 한다

   불빛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하늘엔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태어난다

 

 


 

이준관 시인

1949년 전북 정읍시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동시 '초록색 크레용 하나'. 1974년 심상, 신인상 시 당선 •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 방정환 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2006. 제19회 대한민국 동요 대상. 시집 『황야』 『가을 떡갈나무 숲』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  『부엌의 불빛』 『천국의 계단』 •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역임. 영등포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