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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종인 시인 / 해고통지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7.

박종인 시인 / 해고통지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수십 개의 봄이 의자 밑으로 지나가 버렸지

내 몸에선 여섯 개의 다리가 솟고 열 개의 손이 돋아났지

한 손으로 밥을 먹는 사이 남은 손은 전화를 받고 자판을 두드리고

커피를 뽑고 결재를 받고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었지

지친 내 어깨 위에 불빛들이 떨어져 내리기도 했지

책상 서랍에는 지워진 이름이 수북했어

당신은 아직 젊어, 그가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지

의자에 익숙한 몸이 허리띠를 늘려갔어

그는 독주를 권하고 2차, 3차, 늦은 밤까지 나를 끌고 다녔어

구두를 잃고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지

책상에 엎드려 잠깐 코를 골다 들킨 적도 있지만

변명하지 않았어 그쯤은 알아줄 거라고 믿었지

지난해, 녀석이 위급했을 때 내 살점을 떼어 먹이기도 했지

그 바람에 평생 모은 아파트가 날아갔어

조금만 참아, 잘 될 거야

듬직한 손은 언제나 나를 위로했지

그는 내 청춘의 첫 번째 짝사랑,

몸통을 비집고 웃자란 질긴 손과 발,

그가 불쑥 내민 종이 한 장에 가볍게 잘려졌어

 

 


 

 

박종인 시인 / 아침이 빨간 이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발소리가 어둠을 흔들어 깨우는 시간, 창문들은 여전히 고요하다 창문 속엔 어제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가동 609호가 부스스 잠을 털고 일어선다 하나 둘 창문 밖으로 불빛을 밀어낸다 개수대 물소리가 수직으로 떨어진다 주방이 슈슈 김을 내뿜고 모닝콜은 침대에 달라붙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안방을 건너 주방으로 건너가는 느린 대답에 지난밤의 숙취가 묻어 있다 609호를 체크하고 후다닥 고3이 사는 707호로 올라가는 새벽, 꽃이 매달린 방문을 노크하자 잠든 창문이 금세 꽃처럼 환하다 8층 난간에 서서 밤을 꼬깃꼬깃 접던 여자의 서랍엔 불면이 쌓여 있다 발소리가 빨라진다 해 뜨기 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가가호호 목장을 배달하고 네모로 열린 세상도 빠짐없이 돌려야 한다 잠든 불빛들을 다 불러내는 새벽 발자국 소리에 동쪽 하늘이 빠르게 달려온다 그렇게 달려와서 아침은 빨갛다

 

 


 

박종인 시인

전북 무주에서 출생. 한국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산 부경대학교 부경대학원 석사과정 마침.  2010년 《애지》를 통해 등단. 부산문화재단 진흥기금 수혜. 시집으로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지혜, 2014)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