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시인 / 안개
안개가 아파트 지붕을 딛고 내려와 창문을 제 어머니 젖인 양 어루만지더니 땅바닥으로 흘러내리어, 마침내 세상을 과일봉지처럼 싸버렸다
나의 사색도 나의 연민도 무슨 흘러내리는 것으로 싸버릴 수 없을까 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으로
강희근 시인 / 山에 가서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소 고삐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열매 신물이 이 길가 산풀에 취한 내 어린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해 기운 오후에 이미 하늘 구름에 가 영 안오는 맘의 한 술잔에 가득 가득히 넘친 때 있었나니
내려다 보아 매가 도는 허공의 길 멀리에 때 알아 배먹은 새댁의 앞치마 두르듯 연기가 산빛 응달 가장자리에 초가를 덮을 때 또 내려가곤 했던 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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